미국인 그들.

 

*스피드 그라픽 카메라.(SpeedGraphic Graflex Camera.)

 1989년, Columbus에 있는 작은 카메라 점에서 사연이 많아 보이는 중고 그라플렉스(Graflex) 카메라를 발견했다. 어쩌면 전 주인이 30년대를 풍미하던 저널리스트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들 정도로 카메라의 몸체는 구석구석까지 민감한 상처로 패여 있었다. 과연 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지만, 다음 날 이루어진 테스트에서 F/4.7의 옵타르(Optar)렌즈는 의외로 선명한 화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내 머리 속에는 잠시 위지(Weegee)가 만들어 냈던 아주 날 것(Raw) 같은 이미지들이 엉켜 들기 시작했다. 곳곳에 헐거워진 나사를 조이고 기름칠을 한 뒤, 적당한 필름을 구해 거리로 나갔지만 열쇠 구멍처럼 작은 렌지 화인더(Rangefinder)에 익숙해 지는데 1년 정도 걸렸다.

 

 

 

*축제, 경매 그리고 퍼레이드…(Festivals, auctions and parades…)

   축제와 경매 그리고 퍼레이드(festivals, auctions and parades…)… 주말이면 미국 시골에서는 이들 중 한 가지 행사가 벌어진다. 애플 파이와 핫도그 그리고 각가지 소다수와 레모네이드…행사 천막이 쳐지고 스피커에서 렌디 트라비스(Randy Travis)나 윌리 넬슨(Willie Nelson)의 구성진 컨츄리 송이 흘러 나올 때면 주민들은 서로에게 던질 한 가지씩 의 실없는 농담을 준비하고 비치 의자와 아이스 박스 그리고 커다란 타올 한 장과 함께 거리로 나온다. 버거 킹 마크가 새겨진 퍼레이드 차가 인근 고등학교 브라스 밴드와 함께 나타나면 그들은 아주 친절하게 “Wow!”, “Oh, my!”, Fantastic! 같은 감탄사를 아끼지 않고 마지막 즈음에는 꼭 동네 재향군인회에서 나온 노인네들이 성조기와 함께 나타난다.

 

   중국인?                      “Are you Chinese?”

   아니오. 한국에서 왔어요.      “No, I am Korean.”

   무슨 카메라가 이렇게 크지?   “What kind of camera is this? It’s so big!”

   …사진 한 장 찍어도 되요.?    …Can I take a picture of you?

   누구? 나를?   왜?             Who? Me?  Why?

                           

 

 

몇 마디의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어색하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러면 주민들은 커다란 중고 카메라를 든 조그마한 동양인이 왜? 자신들을 찍으려 하는지 몹시 궁금한 얼굴로 바라본다. 하지만 나 자신도 정확하게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당시 내 머리 속에는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나 위지(Weegee)의 사진 혹은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나  스콜세지(Martin Scorsese)의 영화에서 늘 상 보아 오던 얼굴들이 엉켜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현상된 네거티브가 파일 한 권을 채울 때 까지도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삶이 만든 실 날 같은 왜곡을 본다.’

 (I see a tenuous distortion on their faces.)

 

왜곡… 작업을 시작한지 1년쯤 지나고 나서 막연하게 이 단어가 떠올랐다. 아마도 내가 느꼈던 미국인들의 시선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사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내가 만났던 한국인들은 그들의 시선 속에 너무도 확실한 굴곡을 담고 있었다. 그건 삶에 대한 당연한 고통들… 그러니까 너무 가난하다든지, 말 안 듣는 자식 놈이 속을 썩인다든지,하는 것들말이다. 그런데 가끔 미국인들의 눈길에선 당연하지 않은 굴곡을 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아직도 나는 뉴 올리언스(New Orleans)에서 마주 쳤던 한 소년의 시선을 잊지 못한다. 단순히 몹시 슬픈 눈매였다고 하기에는 알 수 없는 애처러움이 서려 있었는데,

한동안 그의 시선에 마주친 나는 엉뚱하게도 그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더욱더 이상한 것은 그 소년이 슬픈 눈을 가지게 된 이유가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 짧은 순간에도 많은 생각을 하며 그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는데, 소년은 나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2년 후, 한 게이 화가가 유난히 이 소년의 사진에 관심을 보여서’TV Party’ 라는 그의 그림과 교환 하였다. 그런데 당시 그의 화실에서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화집을 넘겨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도 유사한 눈매를 가진 초상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왜 내가 그 소년의 눈매에서 유난히 그의 아버지를 느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슬픔에는 그의 아버지가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풍경들이 솟아 올라 하나, 둘 섬을 만든다.    (최 영미 시인)

 

  

 

영화처럼… 나는 사람의 얼굴이 항상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고 여겨 왔다. 그래서 사진을 만들면 마치 항해 지도를 보듯이 얼굴이라는 풍경 속에 담긴 작은 섬들을 찾곤 한다. 물론 뉴 올리언즈(New Orleans)에서 만난 소년처럼 아주 막연한 상상력이 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주 선명하게 그의 전력이 시선이나 얼굴에 각인 되어 있곤 한다. 그런데 코엔 형제(Joel Coen and Ethan Coen)가 만든 Fargo《 영화를 보면 그야말로 무미 건조한 얼굴들이 등장한다. 아무런 선입관도 이야기도 없는 얼굴들…  대부분 이런 이들의 모습을 캐리커쳐(Caricature)하면 이목구비가 한 두개의 선으로 간단하게 그려진다. 초상에서 추상으로…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미국 사진(American Photographs)에서도 가끔씩 나는 이렇게 텅 빈 시선을 간직한 인물들을 보곤 한다. 마치 오래된 교회가 감리교이던 장로교 이던 간에 그냥 오래된 교회일 뿐인 것처럼…

문제는 이런 비어 있는 얼굴들이 나에게 미국 문화의 모호한 정체성을 상징 해 줄때가 있다는 점이다. 대서양이라는 커다란 글자와 함께 하얀 여백만 있는  지도처럼 과거의 풍경이 사라진 이들의 모습을 보면 미국 문화에 대한 알 수 없는 정체감을 느끼곤 한다.

 

 

*전면.(Facade)

        굉장히 자신 있어 보여                You look quite confident.
        자신? 겉 모습만 그런 거야!         Don’t let my confidence fools you!   It’s only a facade.

 

켄터키의 경마장에서 만난 한 사람이 나에게 화사드(Facade)라는 낯 선 말을 한 적이 있다. 겉 모습, 혹은 전면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이 말 때문에 나는 인물 사진에 대한 고민에 빠져 들었다.  꼭 찍힌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야 좋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사진이 보이는 것 까지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사진에 담긴 인물의 내면을 고찰하라는 선배 사진가들의 의견에 버거움을 느낄 때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에게는 화사드(Facade)가 결국 내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버스(Arbus)의 사진을 보면, 당황 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한 인물들의 화사드(Facade)에 가로 막혀서 더 이상 보는 것 외에는 생각을 진전 시키지 못 할 경우가 생긴다. 그녀의 사진은 세차게 물이 빠져 나가는 수채 구멍처럼 인물의 중심으로 끌어 들이는 흡인력도 있지만 물이 다 빠져 나가고 나면 결국 검은 구멍만 보인다. 이럴 경우, 화사드(Facade)는 그 인물의 전부가 아닌가? 플래시는 이런 화사드(Facade)를 담기에 훌륭한 역할을 한다. 역시 아버스(Arbus)의 말처럼 정작 플래시로 찍히는 순간은 사진가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마치 사건의 기록 사진처럼 플래시가 만들어 내는 디테일과 질감은 현장에서 보지 못했던 흔적들을 낱낱이 각인해 준다.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상상이 진행되지 못할 정도로 날카롭게 가로막기도 한다. _American them_ 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첫 작업에서 지금은 잊혀져 가는 노 배우들의 초상을 담았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사진을 보고 연예 생활의 덧없음이나 애환, 혹은 슬픔 따위를 이야기하였지만 그건 보는 이들의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그들은 단지 화사드(Facade)였을 뿐이었다.

신 카나리아와 트위스트 킴(1993)

  

* 미국인 그들. (Americans Them)

   언젠가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사진을 수집하는 일본인 소장 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에반스(Evans)의 사진만큼이나 오래된 듯한 가죽 가방에서 엄숙하게 원화를 꺼내 나에게 보여 주었다. 기대했던 대로 사진에는 낡은 교회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사진이 무겁게 느껴졌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일본인 소장 가는 원화의 값어치와 배경에 대해서 꽤나 장황하고 심각한 설명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의 동사무소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진처럼 엉뚱할 정도로 정면에서 찍은 그 교회의 모습만이 떠오른다. 너무도 당연해서 어려운 사진, 그러나 교회는 그냥 교회이고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이었다. 지난여름, 잠시 미국의 동부를 여행할 때도, 수많은 에반스(Evans)의 교회와 데쟈뷰(Deja-vu)를 했다. 그리고 1990년, 오하이오의 시골에서 보았던 장소와 흡사한 곳을 지나친 적도 있다. 똑같은 프리웨이와 드문드문 나타나는 맥도널드, 그리고 가끔씩 녹슨 펌프가 매달려 있는 허름한 주유소… 여기서도 매주 오하이오의 시골에서 보았던 훼스티발이나 경매가 열리지 않을까? 아마 10년 후에도 이 곳에서는 커다란 버거 킹 마크가 새겨진 꽃차로 시작해서 동네 고등학교의 브라스 밴드와 재향군인회에서 나온 노인들의 거수 경례로 마무리를 짓는 퍼레이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아버스(Arbus)의 사진과 위지(Weegee)의 날 것 같은 인물들을 찾아다니다가 Fargo에 나올 듯한 비어 있는 얼굴들과 마주쳐서  묘한 당혹 감에 젖을 중국인이나 일본인 사진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나처럼 상처 많은 그라플랙스(Graflex)카메라를 쓰던 아니면 현란하게 빠른 디지털 카메라를 쓰던 간에, 항시 그 자리에 초현실처럼 서 있는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낡은 교회를 보게 된다면 미국 문화의 묘한 정체감에 혼란스러워 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결국은 그도 미국인을 영원한 타인이라는 그들로 느끼게 될 것이다.

 

 

                                                            2000년 4월 3일, Americans Them의 편집을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