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사이더의 이중시선’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주변의 평범한 인물들을 앵글에 담고 있는 오형근은 신진 사진가의
한사람이다. 그가 포착한 주변인들은 기록의 단계를 넘어 일상을 전형화하는 심도를 갖고 있다.
필자는 그것이 다큐멘터리와 허구사이에서 그 무엇을 찾으려는 아웃사이더화된 시선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오형근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재학할 때부터 평범한 ‘외부인(outsider)’들의 모습을 찍기 시작하였다. 물론 여기서 ‘아웃사이더’ 란 실체가 있는 사회 단위라기보다는, 문화적 변두리에 포진한 ‘등록되지 않은’ 삶의 한 형태를 쉽게 부르기 위해 고안된 것에 가깝다. 그들은 노후한 지방 소도시의 진부한 페스티벌에 나타나 무표정하게 돌아다니는 노부부나, 아직도 하얀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 40대의 세일즈맨. 또는 해변에 앉아 나른하게 기타를 두드리는 학교 밖의 소년이다. 이 사진들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오형근 자신의 대답은 이들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영화배우들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미국의 영화배우, 일테면 배우타입에 대한 광범위한 목록을 머리 속에 갖고 있는데, 그것은 거의 우리가 여운계나 최불암을 꼬장꼬장한 시어머니나 소박한 가부장으로 떠올리는 수준, 다시 말해 안정효 소설 속의 ‘헐리우드 키드’ 의 세계와도 같다. 그는 뉴 올리언즈에서 찍은 소년을 우디 가쓰리이라는 디즈니 영화의 배우 같다고 꼭 짚어 얘기할 정도이다.
그가 ‘태평극장’을 드나들며 이태원에서 성장했고, 사진학교의 영화클래스를 들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태원 키드’로서는 자연스러운 귀결인 셈이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이란 기지촌이라는 ‘외부인의 세계 내부’에서 ‘그 세계의 외부인’으로 성장했다는 매우 다중적인 문명사로 기술함으로써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찍은 사진에서부터 최근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은 영화로 대표되는 픽션으로서의 인물과 그들의 이른바 타자성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으로 일관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지기 어려울 때도 있고, 때로는 관심의 초점이 한쪽에 기울 때도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찍은 일련의 이태원 사진은 전자의 범주에 속할 것이며, 최근의 광주 사진들은 픽션과 사진적 리얼리티에 대한 다소간 개념적인 접근이 될 것이다.
이태원 사진은 미국에서 찍은 외부인의 ‘불확실한 존재’ (Uncertain Presence: ’93년 뉴욕의 미드타운 Y갤러리에서의 첫 전시회 제목)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남의 기록이면서 그들의 캐릭터 자체가 이국의 문화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면에서 일종의 픽션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 그들 자신이 무대 위에 서는 배우나 가수들, 즉 보여지기 위해 꾸며진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타자성에 관한 한 우리는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아버스는. 쌍둥이가 실은 완전히 다르게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균형 속에 깊이 내재해 있는 차이, 생체적인 돌연변이의 가능성, 문명 속에 해괴하게 깃든 자연의 혼란 등을 통해서 불확실한 존재와 ‘확실한 존재’ 와의 관계를 상대화한다. 오형근의 난쟁이 배우와 게이 댄서에 대한 관심은 실제로 아버스의 그것과도 다르지 않다. 오형근은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삶이 만든 실낱같은 왜형(歪形)을 본다”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실낱’이란 한마디로 명백히 말하기 어렵다. 김불이 씨를 찍은사진의 경우, 왜형은 신체 비례에서의 아동성과 그의 얼굴이 보여주는 나이 사이의 불균형 즉 균열만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도시의 전형적인 뒷골목에 ‘선녀암’ 간판이 매달려 있는 지극히 평범하되 심원한 문제가 공존하고 있는 장소 자체이기도 하며, 그가 걸쳐 입은 구슬 재킷의 반짝임과 그 옆에 우연히 반짝이 는 연통 표면과 부지불식간에 교환하는 어떤 정보같기도 하다.
오형근의 관심은 이태원의 대표적인 게이바 ‘여보여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경희 씨의 얼굴과 일련의 ‘아줌마’ 사진을 비교하면서 더욱 섬세하게 읽혀진다. 왜냐하면 중년 여인들과 게이 댄서의 얼굴은 어느 한쪽의 성(sexuaility)이라기보다는 모두 각각의 성들(sexualities)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인물들은 복수의 ‘성차(性差)들’을 이루는 개인들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한다. 그것은 우선 우리가 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느끼는 성의 엄격한 이원적 경계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작가는 ‘아줌마의 얼굴에서 그녀들의 여성성이라기보다는 여성성의 부재를 꺼내 보여주기 위해 혹은 그 반대로 그렇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줌마를 선택한다. 그녀들의 진주 목걸이. 요란한 안경테 장식. 표범 무늬 코트, 무표정 등은 그녀가 여성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녀가 여성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해 성의 실재보다 성의 흔적이 강렬하기 때문에 미리 주어진 성 정체성은 하나의 선입 관념으로 떨어져 내린다. 반면에. 오경희 씨와 중년 부인들의 골격과 피부. 액서세리와 복장은 잃어버렸거나 공인되지 않는 성을 탈환하려는 의지와 그것이 만들어 낸 픽션과 마스크처럼 보인다. 즉 여기서 성은 자연이 아니라 문명이다. 오형근이 면상에 대고 플래시를 터트리고 배경을 일종의 무대처럼 인물의 뒤로 멀리 보내는 이유도 바로 그런 배우로서의 그들을 붙잡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가장 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진에서는 하얗게 되어 보이지 않는 콜드크림의 반사광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그들은 여전히 여성, 더구나 일수 아줌마?복부인?야쿠르트 아줌마?파출부 아줌마 등의 전형(type)으로 보이지 않는가? ‘아줌마’ 자체가 특수한 여성성은 아닌가? 사실 위에 말한 모든 이야기는 그 반대 방향으로도 설명이 가능할지 모른다. 즉 특수한 개인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타입이고, 과거의 여성만이 아니라 현재의 여성이고, 비성(比性)이면서 특정한 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개인이 특수한 동시에 타입이라는 면에서 하나의 일반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 일반론이야말로 풍부한 함의와 중요성만큼, 특히 시각적으로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오형근 사진의 진정한 핵심이다. 사진에서 일반인, 혹은 타입은 사진적 사실성이 포착한 고립 무원한 개인성에 의해 전복당하는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오형근의 사진에 있어서 특수하며 유일무이한 인물은 그자체로 ‘왜형’이라는 말의 내용이며 정의(定意)인 셈이다.
오형근의 인물에 대한 관상학적 접근은 일반적 삶 속에 깃든 일탈의 가능성, 자아 내부의 타자에 대해서’ 가 아니라 바로 타자 ‘를’ 보여준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것, 그 사람들은 픽션도 마스크도 아닌 ‘그’ 사람들인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오형근의 작업은 그야말로 사진 자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근본적으로 사진이 무한한 디테일의 세계이며, 자잘한 흔적들의 뒤섞임이면서도 총체적인 하나의 지도인 것처럼 오형근의 번쩍거리는 피부의 세부들-뛰어난 인화기술( 印畵技術)에 의해 가능해진-은 보는 자가 보이는 자에게 강요하는 일방적 정체성을 보는 행위 그 자체부터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형근이 이 사진들에서 느낀다는 ‘슬픔이라는 불안정한 행위는, 뚜렷한 왜형 그 자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왜형’ 이 보다 깊숙이 숨겨져 있을 뿐인 ‘표준적 인간’ 이라는 실낱같은 현실 원칙으로 넓게 향해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표준명은 의학적이나 관상학적인 픽션이면서 다분히 시각적인 관념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 자아의 안전을 위해 발명된 이미지 곧 보는 자의 불안정한 정체성이라는 이미지이다.
‘성’ 이 자연인가 문명인가, 주어진 것인가 구성된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단견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사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은 자연의 직접적인 효과이면서 기계 기술에 의존한 인위적인 표현이다. 다큐멘터리도 픽션이며, 픽션에도 진실이 반영된다.

<꽃잎>이라는 영화를 찍기 위해 광주 시민들이 금남로에 자원해 온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들에게 광주항쟁의 경험을 되살려 내기 위해 감독은 공포탄을 쏘아대는 등 분위기를 잡는다. 그 상황은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물론 거짓이지만, 그 상황자체는 진실이다. 이 때 오형근의 스틸 카메라는 나선으로 꼬인 이중의 현실을 포착한다. 우리는 배우를 보면서 동시에 그 구체적인 ‘아저씨’들을 본다. 그 ‘아저씨’들이 엑스트라 배우가 되어 그 차리에 서게 된 현실은 바로 광주를 재현하기 위한 파생적인 현실이다.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오형근은 배우가 된 광주 시민들로부터 어떤 배우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거칠게 말해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합판으로 만든 장갑차 옆의 미남 배우는 공수 부대 장교로 캐스팅되어 내려간 서울 연예인 협회의 회원일 것이고. 엑스트라로 고용된 광주시민들은 영화가 현실적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그저 빈둥거리는 아웃사이더들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배우는 아주 현실적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 그들은 그저 그들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오형근의 사진에 나타난 결과는 어떠한가. 배우는 역시 배우이고, 배우가 되려는 시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전혀 배우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신카나리아의 사진이 있다. 인기 연예인이었던 그녀가 관객으로부터 부여받았거나 아니면 스스로 획득한 자신의 ‘표정-기호(sign)’를 사진가에게 맡겼다. 사진가는 얼굴에 플래시를 터트려 그녀의 ‘표정-기호’가 얼마나 그녀 자신에게만 고유한 것인지를 폭로한다. 그녀의 얼굴은 광주 사진의 두 가지 방향, 즉 배우이면서 배우가 아닌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상태로서 존재한다. 그녀가 왕년의 스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그녀를 스타로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보여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이다. 조금 멋을 부려 말하자면, 바로 이것이 ‘이태원 키드’가 신 카나리아를 바라보는 ‘외부인’들 사이의 내부적 시선인 것이다.

박 찬 경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