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형 근

알랭 사약, 퐁피두센터 사진부장(1972-2008)

하나의 사진을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은 사진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도시의 벽이나 신문 잡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TV, 컴퓨터, 휴대전화 등 온갖 기기들의 화면을 보더라도,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이미지들이 눈앞에 산재해 있다. 이들 중 어떤 단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라, 말을 걸고, 마침내 우리의 관심을 끌어 기억 속에 새겨질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전문가들이 부르는 소위 ‘좋은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 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좋은 이미지’를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디드로Didrot 가 자신의 여자 친구인 소피 볼랑Sophie Volland 에게 보낸 편지에서 묘사한 가련한 한 남자의 행동처럼 헛되고, 불가능하며, 쓸모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집안 한 구석에 틀어박혀 매력적인 애인의 시중이나 열심히 들 일이지, 다락방에서 지하실까지 온 종일 오르락내리락하며 하루를 보내는 이 남자의 행동” 같은 것 말이다.

100년 전 사진가들은 평생 몇 백 장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그러다 현대적 사진이 도래하면서 몇 만장을 넘기더니, 이제 사진가들은 수 십 만 장의 사진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디지털 사진이 만들어내는 수 백 만 장의 이미지에 놀라지 않는다. 오늘날 웬만한 리포터나, 좀 한다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이 장난스러우면서도 혹독하게 비난했던, 일종의 ‘인덱스를 만들려는 치명적인 발작’을 해댄다. 그러나 그들이 예술가로 자처할 때에는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왜냐하면 화상들이 사진작가들의 생산품을 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작품의 수를 줄이고 그 크기를 확대하면서 그들에게 ‘시장의 법칙을 존중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 편, 사진 이미지가 ‘전문가들’, 즉 사진을 직업으로 하는 리포터나 기자와 같은 이들 사이에서의 문제일 경우, 사진은 어떤 사건을 알리거나, 그 사건의 결과적 반향이 집단적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때에 한에서만 가치를 얻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 수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지의 기술적 수준 또한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예를 들어 런던 지하철 테러 사진처럼 한 아마추어가 휴대폰으로 우연히 찍은 이미지들은 많은 결점을 드러내더라도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여진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1993년 9월23일 프랑스 프레스 에이전시의 오생Hocin 이 찍은 유명한 <알제리의 마돈나 Madone Algérienne>는 마치 절묘하게 구성된 무대의 한 장면처럼 그 모든 형태적, 구도적 완벽성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사진이 어떤 사건의 시각적 흔적을 우리에게까지 전달해서, 사건의 현장과 멀리 떨어진 ‘일상의 안락한 정적 속에 빠져있는 우리’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사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는 사실이다.

소위 ‘위대한 사진가들’이라는 사진작가들이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이러한 시각적 증언을 가져다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등의 주장을 계속한다 해도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이러한 증거는 너무도 연약하기 때문이다. 카파Capa 는 전선에서 스페인 국가주의자들에 맞선 공화파 군인들과 함께 있었고, 브라사이Brassai 는 그의 <밤의 파리 Paris de nuit> 이미지를 찍기 위해 대 알베르파 건달과 양아치들에게 뒷돈을 건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생한 현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장은 사실 또 다른 현실, 즉 사진이 조작되었음을 가리고자 하는 입장에 불과할 수도 있다. 1936년 9월 5일 안달루시아Andalousie 의 코르도바Cordoba 전선에서 전사한 어떤 군인의 사진은 끊임없이 실제성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이미지는 아마 1차 세계대전에 관한 수많은 역사서적에서 발견할 수 있는, 1917년 베르덩Verdun 전투에서 전사한 프랑스 병사의 시신을 직접 보고 그렸다는 그림보다도 덜 생생하다. 이는 보다 주의 깊게 관찰해 본다면 금방 들통이 나는데, 이것은 레옹 푸아리에Leon Poirier 의 영화 <베르덩, 역사적 관점>의 한 장면을 1928년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브라사이의 <밤의 파리 Paris de nuit> 사진의 진위 여부도 순식간에 해체되어버린다. 우선 기술적으로, 그리고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그러한데, 그 이유는 어떤 주어진 순간에 가능한 무한한 장면과 그 이미지들 가운데서 우리가 선택한 것은 미리 결정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들은 물질화된 정신적 이미지일 따름이며, 어떤 이야기의 지속성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재구성들일 따름이다.

사진은 천성적으로 속임수이다. 사진은 죽은 것이나 산 것을 똑같이 포착하고, 거기에 동일한 현실성을 부여한다. 언젠가 데이빗 호크니David Hockney 는 나에게 자신의 일기장인 두툼한 사진첩을 보여주었다. 거기서 나는 매우 위협적으로 보이는 한 회색 곰을 보았는데, 그 곰은 사실 공항의 한 홀을 장식하는 박제였다. 그리고 사라 문Sarah Moon 은 얼마 전,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말의 이미지-어둑한 공원에 받침대 없이 고정된 대리석 조각-를 언급하면서 “사진의 기적은 생명이 없는 대상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오형근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매혹적이고 불가능한 공간의 컨텍스트 속에서 읽혀져야 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에 바쳐진 일련의 시리즈>에서, 시위대가 광주의 거리와 광장을 점령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단호함과 군인들의 당혹한 표정, 그리고 그 명백한 충돌의 흔적 등이 잘 그려져 있는 그의 이미지는 동시대의 역사 메뉴얼에서 발췌한 역사적 인화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어떤 영화를 찍기 위해 제작한 무대장치에 불과하다. 갤러리나 미술관의 흰 회벽에 걸기 위해 작업한 이 이미지들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되는데, 예술의 비밀스런 연금술 덕분에 덧없고 상황적인 사실주의적 이미지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환골탈태한다. 그것은 오형근이 사물의 외적인 무질서 속에서, 그리고 현실 세계의 혼란함 속에서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영구불변한 요소를 추출해 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이미지는 심사숙고하여 구성한 공간 속에 위치하는 정신적 비전으로서, 무한한 변화들 가운데서 무턱대고 채취하거나, 사전에 아무 생각 없이 발견된 오브제가 아닌 것이다. 즉석에서 채용된 배우들의 자연스런 연기에 의해 강조된, 이 이미지들의 외적인 솔직성이 이 이미지들을 완벽하게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러한 실천은 르포르타주의 실천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미지에 예시적이고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실제성의 재구성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싸이는 그의 <피카소와의 대화> 속에서, ‘예술가가 주장할 수 있는 닮음의 의미’를 피카소에게 설명하도록 떠넘긴다. 그는 “화가란 자연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결코 자연을 회화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자연은 회화의 기호들을 통해서만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 기호를 만들 수 없으며, 이 기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닮음을 겨냥해야 한다. 초현실이란 사물의 형태와 색채 너머에 존재하는 바로 그 깊숙한 닮음으로써, 나로서는 이러한 생각 이외에 다른 닮음을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형근의 <아줌마 시리즈>에서 공간과 빛은 어떤 이미지를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변환의 공모자들이다. 이미지로 작품을 만드는 이로서, 오형근은 이제까지 거의 전시된 적이 없는 그의 초기작품인 <이태원 이야기>에서처럼 이미지의 제왕으로 군림한다. 작가는 구성의 정면성과 플래시의 난폭함을 통해 인물에 복합적이며 매혹적인 어떤 현재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짜이다. 시선은 어울리지 않는 테를 한 안경 뒤로 숨고, 화장은 너무 완벽하다. 머리는 너무 곱게 빗었고, 미소는 억지스럽다. 모든 것이 추하다. 지나치게 큰 보석들, 금박으로 번쩍이는 장식, 블라우스의 꽃무늬, 그리고 전통 의상의 자수조차 산업적 제조물의 경박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중년 여성들의 표정에는 그 어떤 터무니없거나 비장함도 묻어나 있지 않다. 오형근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 사회가 서구화되며, 그토록 바라던 과시적 번영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의식하게 한다. 배불리 먹고 모조품으로 한껏 ‘멋’을 낸 여인들은 그 얼굴의 땀구멍에 스며있는 촉지 할 수 있는 걱정스런 사회 질서를 표현한다.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 대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가족 환경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녀들은 그저 딱딱하고 형식적인 사회의 인위적 요소들을 드러내기 위해 거기에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명증성은 인물이 빛이 비춰진 좁은 공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만큼 강력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렇게 찍힌 고립된 여성들의 이미지는 한국 사회의 여성을 은유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이 매력 없는, 굳은 표정의 얼굴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별로 낙관적인 비전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최근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사춘기 소녀들의 대형 칼라 초상 시리즈> 속에서 여전히 주된 관심사다. 지나칠 만큼 진하게 덧바른 화장의 가면 뒤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머뭇거리는 것은 바로 이 어린 아가씨들의 서투름과 순진함이다. 그리고 그들의 전 세대 소녀들이 그렇듯이, 전체 한국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듯한 어떤 불안감을 아직 완벽하게 감출 수 없어 보인다.

따라서 이 두 시리즈에서 작동하는 것은 동일한 예술적 전략이다. 나는 한국 사회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그 용어가 훨씬 더 복잡한 사회적 개념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오랫동안 ‘아줌마’가 장르적인 용어가 된 하나의 대명사를 지적하는 것으로 믿었었다. 그런데 이 수식어는 주제의 외양이나 사회 속에서의 위치에 기인하기 보다는, 어떤 사회적 의식과 거기에 적용된 전략에 기인한다. 오형근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회적 인류학을 통해 그것을 읽게 해주었다. 이러한 분류를 결정하고, 그의 모델 각각에게 어떤 예시적인 가치를 부여한 사람은 바로 예술가 그 자신이고, 이 이미지들의 창조자로서 유일한 존재이다.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여인들 그 자체가 아니라, 여인들 속에 수 백 년 쌓여 있는 사회적 인습이나 풍습, 선입관들이다.

브라싸이에 따르면, “사진이란 사물에 주어진 발언이다.”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인 닮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든 사진은 자신의 운명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즉 언제나 세상을 흑과 백으로, 그리고 2차원으로 옮겨 적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이미지가 되기 위해” 사진은 예술의 결코 변할 수 없는 규칙들을 존중해야한다. 그는 이를 “살아 있는 사물과 찍혀진 형상의 균형… 고전적인 균형”이라고 강조한다. 예술적인 야심이란 “평범하고 진부한 것으로 특별한 무엇을 만들도록” 부추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 이 수 균, 서울시립미술관 학예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