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한 소녀’ 통해 ‘가면 쓴 사회’ 응시하다 – 임종업


오형근(45·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소개하자. 작가는 무척 싫어할 테지만 할 수 없다. 1999년 ‘아줌마’ 사진전으로 대박을 터뜨린 작가다. 커다란 진주목걸이를 하거나, 왕방울 진주반지를 끼고, 아니면 꽃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들 사진으로 전시장을 채웠다. 신문들은 아줌마를 통해 한국 사회를 들여다봤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그의 전화통에 불이 났다. 바로 직전 성공한 ‘이중섭전’보다 많은 관객이 들었다. 그 뒤 텔레비전에서 아줌마를 소재로 하는 기획을 하면 으레 그를 호출했다.

또한 그는 <접속> <친절한 금자씨>에 최근 <추격자>까지 40여편의 영화 포스터 사진도 찍었다.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스쳐 지나가는 전도연 한석규의 시선을 포착한 1997년작 <접속> 포스터는 영화 포스터 사상 처음으로 인터넷 카페에서 팔았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아줌마를 주목했던 그는 이후 소녀들로 눈을 돌렸다. 2004년 ‘소녀연기’란 주제로 넥타이를 맨 직장인이 득시글거리는 광화문 일민미술관에 교복 입은 여고생 사진을 걸었다. 여기가 일본인 줄 아느냐, 혹시 관음증 환자 아니냐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소녀들의 화장법’이란 제목으로 더 어린 소녀들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소녀 25명을 찍어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31일까지 전시회를 연다. 전시 전 기자간담회에선 변태라는 오해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가장 세련되고 예쁜 영화포스터를 찍으면서도 가장 불편해 보이는 사진을, 그것도 여성만을 찍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사진가를 이태원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왜 아줌마, 여고생 소녀 등 여성만 찍습니까?

“저는 아저씨처럼 ‘파사드’(건물 전체의 인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 건축용어)가 없고 마스크만 있는 얼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란한 화장에 장신구를 한 아줌마가 겉보기에 용감해 보이지만 허전한 뒤가 보이는 분들입니다. 소녀들도 그렇습니다.”

-소녀들을 찍으니 소녀가 보이던가요?

“초등학교 6학년인데도 깊은 시선을 가진 아이가 있더라고요. 하지만 막상 들어보면 신통한 게 없어요.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시선은 10년 전 일본 하라주쿠나 신주쿠에서 봤던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많이 몰리는 밀리오레 등에 가면 흔히 보입니다. 화장하는 아이도 많아졌습니다. 이번에 만난 아이들 90%가 서클렌즈를 끼었습니다. 예전에는 연기학원 다니는 애들이나 끼고 다니던 거였죠. 전에는 화장하는 아이들을 날라리로 봤는데 요즘은 그게 보통입니다. 아이들한테 화장은 주류임을 보여주려는 시도이거나 자기방어 수단인 것 같습니다.”

-소녀 사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여고괴담> <장화 홍련> 등 소녀 영화 오디션 심사위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기 지망생들이 소녀 연기를 공식처럼 하는 겁니다. 하염없이 먼 데를 바라보며, “나는 몰라요, 이 세상이 얼마나 거친지를 …” 식으로 감정을 잡아요. 엄마, 친구 언니, 고모에게 배우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나 패션잡지에 나오는 소녀 이미지였습니다. 남자 연출자들이 만든, 남성을 의식한 시선, 몸짓, 발짓인 것도 모른 채 …. 그때 ‘소녀 연기’ 사진을 구상했습니다.”

-이미지를 배우는 게 왜 문제인가요?

“문제는 시선을 배운다는 겁니다. 그걸 체득하면 정신에도 영향을 줍니다. 정신이 우러나오는 게 시선인데 거꾸로 배운 시선이 정신에 영향을 줍니다. 슬픈 눈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따라하면 슬퍼지는 것처럼.”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나요?

“서서히 좀먹어간다는 생각을 합니다. 화장이나 제스처, 시선이 금방 인생을 바꾸지는 않죠. 그러나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조금씩 쌓이면서 아이를 변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그러는 데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한국은 좀 심각해요. 연예인 베끼기가 비슷한 일본 소녀들은 무척 도발적이지만 자신감 있어 보여요. 반면 우리 아이들은 불안해 보입니다. 일본은 성적인 걸 제한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인데 우리는 숨 쉴 공간이 없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죠?

“저는 현상을 담을 뿐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본질을 찍는 게 아니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담아내는 겁니다. 아줌마 사진전 때도 똑같은 질문을 해요. 저는 아줌마를 슬프게 봐요. 당시 전시회의 부제가 ‘한국에서 아줌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였습니다.”

-그때 반향이 대단했습니다. 잠깐 얘기를 더 해주시죠.

“별 기대 없었는데 보도되면서 기사들이 엄청나게 나왔어요. 기사 패턴도 비슷했습니다. 파마 머리, 짙은 화장, 지하철 자리 차지하기 등을 말하면서 그들은 우리의 엄마이고, 부인이고, 우리 할머니다, 우리나라의 원동력이라고 하는 거죠. 텔레비전 주부프로그램들도 다들 연락해왔어요.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무도 내 사진을 사진으로 안 보더라고요. 더 외로웠던 것은 저를 공격적 지점에 놓는 거였어요. 그런 사진이 아닌데 …. 여성단체한테서는 하도 욕을 많이 먹어 사진 속 인물들한테 참 미안했습니다.”

-사진을 거꾸로 읽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여성이 힘든 사회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아저씨 본위의 사회죠. 아줌마들에게선 전형성이 읽힙니다. 꽃무늬 스카프, 눈썹 문신, 진주목걸이 등의 코드가 있고, 보험 아줌마, 요구르트 아줌마, 시장 아줌마 등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전형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남편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줌마들한테서 보이는 불안함은 그런 얇은 정체성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소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을 한번 더 보세요. 제가 여성을 건드리는 것은 우리나라가 아저씨, 오빠의 나라임을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그는 이쯤에서 화제를 바꾸고 싶어했다. 종이를 꺼내 ‘아줌마 사진’이라고 쓴 뒤 사람들은 아줌마에 강세를 두고 자신을 바라본다면서, 자신은 사진에 강세를 둔 사진가라고 말했다. 달을 가리키는 손을 봐달라는 것이다.

“저는 명백한 슬픔, 사회적인 소외 문제를 담는 데는 관심 없어요. 그런 건 다른 사람들이 무수히 해왔어요. 제 관심은 경계인입니다. 가정인도 사회인도 아닌 아줌마, 여인도 아이도 아닌 소녀, 전문연예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화장법 등이죠. 현대사회는 이처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제 사진은 새로운 개념의 다큐입니다. 저를 센세이션 지향자, 취약지점 공격자로 읽는 것은 부당합니다.”

-오 교수의 사진에는 전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본디 전략입니다. 제 전략은 낯설게하기예요. 소녀 사진의 경우 증명사진을 크게 확대해 디테일을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대상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익숙할 것 같은 소녀 사진을 크게 하니까 모공, 솜털, 뾰루지, 서클렌즈, 서툰 화장 등 다 드러나지 않습니까? 아줌마 사진에서 플래시를 쳐 배경을 어둡게 한 것은 고립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이마 윗부분 여백을 잘라낸 것도 일부러 불편하게 만든 거죠. 저는 구도에 스토리를 담는 게 아니라 디테일이 스스로 말하게 합니다.”

-인물사진가로 어려움은 없습니까?

“인물사진가는 천형과 같아요. 소나무나 도자기는 안 덤빕니다. 제 사진이 불편한 것은 사람이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 사진이 잔인하고 실제 못된 면도 있지만 저는 제가 옳다고 봅니다. 미학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상쇄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저는 적어도 소재를 가지고 장난치지 않습니다. 12년 동안 세번밖에 전시를 안 했습니다.”

아줌마, 소녀, 사진을 모두 이야기했는데 뭔가 빠진 듯했다. 바로 ‘사진가’다. ‘사진’과 ‘가’를 이을 차례다. 그는 2%가 부족한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아줌마 작업은 어릴 적 엄마에 대한 기억과 관련돼 있어요. 초등학교 때 한 달 한 번 육성회 날이 되면 곤혹스러웠습니다. 다른 엄마들하고 달리 우리 엄마는 두꺼운 화장에 한복을 입고 오셨어요. 싼 한복은 번쩍거렸고 긴장한 탓인지 두꺼운 화장이 번질거렸습니다. 그게 슬펐습니다. 그 다음부터 번쩍거리는 것은 다 싫었어요. 아줌마 작업할 때 보니까 본질이 피부의 번쩍거림이더군요.”

-이태원에 스튜디오를 마련한 이유는 뭔가요?

“6살부터 이태원에 살았어요. 여기는 제 놀이텁니다. 옛날 이태원은 지금보다 험악했어요. 바로 이 골목에 살았는데, 여길 ‘후커스 힐’(창녀 언덕)이라고 불렀습니다. 골목 앞에 출입을 통제하는 ‘레드존’ 표지판이 있었고 헌병이 순찰을 돌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국내 못 들어온 영화를 미8군 부대 안에서 다 봤죠. 저는 어려서 이태원 키드였고 사진의 출발도 이태원입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처음 작업한 것도 이태원시리즈였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우연이었습니다. 원래 영화감독이 꿈이었어요. 미국 유학도 영화 공부하러 간 거였습니다. 갔다가 영화학교 시험이 1년 늦어지는 바람에 그냥 사진학교에 갔습니다. 사진 하면 찐빵 모자 쓰고 바위틈에 여자 뉘어 놓고 누드 찍고 하는 것을 연상해서 ‘내가 저걸 왜 해’, 했죠.”

그는 아직 영화감독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감독 되면 찍으려고 쓴 시나리오도 3편이나 있다고 한다. 그가 가장 먼저 찍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젊은 힙합 댄서인 남녀 4명의 이야기다. “형제 중 한 명이 이근안한테 당했다는 것을 알고 이근안을 잡아 사흘 동안 고문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물론 이근안씨가 잡히기 전의 이야기다.

4시간 넘는 인터뷰 동안 그가 가장 많이 말한 단어는 ‘솔직히’란 부사였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 세계,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긴 오해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는 후련해하는 듯했다. 한국에서 인물 사진을 찍는 것, 그건 아직은 쉽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임종업 <선임기자>

‘화장한 소녀’ 통해 ‘가면 쓴 사회’ 응시하다 – 임종업
오형근(45·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소개하자. 작가는 무척 싫어할 테지만 할 수 없다. 1999년 ‘아줌마’ 사진전으로 대박을 터뜨린 작가다. 커다란 진주목걸이를 하거나, 왕방울 진주반지를 끼고, 아니면 꽃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들 사진으로 전시장을 채웠다. 신문들은 아줌마를 통해 한국 사회를 들여다봤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그의 전화통에 불이 났다. 바로 직전 성공한 ‘이중섭전’보다 많은 관객이 들었다. 그 뒤 텔레비전에서 아줌마를 소재로 하는 기획을 하면 으레 그를 호출했다.

또한 그는 <접속> <친절한 금자씨>에 최근 <추격자>까지 40여편의 영화 포스터 사진도 찍었다.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스쳐 지나가는 전도연 한석규의 시선을 포착한 1997년작 <접속> 포스터는 영화 포스터 사상 처음으로 인터넷 카페에서 팔았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아줌마를 주목했던 그는 이후 소녀들로 눈을 돌렸다. 2004년 ‘소녀연기’란 주제로 넥타이를 맨 직장인이 득시글거리는 광화문 일민미술관에 교복 입은 여고생 사진을 걸었다. 여기가 일본인 줄 아느냐, 혹시 관음증 환자 아니냐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소녀들의 화장법’이란 제목으로 더 어린 소녀들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소녀 25명을 찍어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31일까지 전시회를 연다. 전시 전 기자간담회에선 변태라는 오해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가장 세련되고 예쁜 영화포스터를 찍으면서도 가장 불편해 보이는 사진을, 그것도 여성만을 찍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사진가를 이태원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왜 아줌마, 여고생 소녀 등 여성만 찍습니까?

“저는 아저씨처럼 ‘파사드’(건물 전체의 인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 건축용어)가 없고 마스크만 있는 얼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란한 화장에 장신구를 한 아줌마가 겉보기에 용감해 보이지만 허전한 뒤가 보이는 분들입니다. 소녀들도 그렇습니다.”

-소녀들을 찍으니 소녀가 보이던가요?

“초등학교 6학년인데도 깊은 시선을 가진 아이가 있더라고요. 하지만 막상 들어보면 신통한 게 없어요.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시선은 10년 전 일본 하라주쿠나 신주쿠에서 봤던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많이 몰리는 밀리오레 등에 가면 흔히 보입니다. 화장하는 아이도 많아졌습니다. 이번에 만난 아이들 90%가 서클렌즈를 끼었습니다. 예전에는 연기학원 다니는 애들이나 끼고 다니던 거였죠. 전에는 화장하는 아이들을 날라리로 봤는데 요즘은 그게 보통입니다. 아이들한테 화장은 주류임을 보여주려는 시도이거나 자기방어 수단인 것 같습니다.”

-소녀 사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여고괴담> <장화 홍련> 등 소녀 영화 오디션 심사위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기 지망생들이 소녀 연기를 공식처럼 하는 겁니다. 하염없이 먼 데를 바라보며, “나는 몰라요, 이 세상이 얼마나 거친지를 …” 식으로 감정을 잡아요. 엄마, 친구 언니, 고모에게 배우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나 패션잡지에 나오는 소녀 이미지였습니다. 남자 연출자들이 만든, 남성을 의식한 시선, 몸짓, 발짓인 것도 모른 채 …. 그때 ‘소녀 연기’ 사진을 구상했습니다.”

-이미지를 배우는 게 왜 문제인가요?

“문제는 시선을 배운다는 겁니다. 그걸 체득하면 정신에도 영향을 줍니다. 정신이 우러나오는 게 시선인데 거꾸로 배운 시선이 정신에 영향을 줍니다. 슬픈 눈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따라하면 슬퍼지는 것처럼.”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나요?

“서서히 좀먹어간다는 생각을 합니다. 화장이나 제스처, 시선이 금방 인생을 바꾸지는 않죠. 그러나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조금씩 쌓이면서 아이를 변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그러는 데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한국은 좀 심각해요. 연예인 베끼기가 비슷한 일본 소녀들은 무척 도발적이지만 자신감 있어 보여요. 반면 우리 아이들은 불안해 보입니다. 일본은 성적인 걸 제한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인데 우리는 숨 쉴 공간이 없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죠?

“저는 현상을 담을 뿐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본질을 찍는 게 아니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담아내는 겁니다. 아줌마 사진전 때도 똑같은 질문을 해요. 저는 아줌마를 슬프게 봐요. 당시 전시회의 부제가 ‘한국에서 아줌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였습니다.”

-그때 반향이 대단했습니다. 잠깐 얘기를 더 해주시죠.

“별 기대 없었는데 보도되면서 기사들이 엄청나게 나왔어요. 기사 패턴도 비슷했습니다. 파마 머리, 짙은 화장, 지하철 자리 차지하기 등을 말하면서 그들은 우리의 엄마이고, 부인이고, 우리 할머니다, 우리나라의 원동력이라고 하는 거죠. 텔레비전 주부프로그램들도 다들 연락해왔어요.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무도 내 사진을 사진으로 안 보더라고요. 더 외로웠던 것은 저를 공격적 지점에 놓는 거였어요. 그런 사진이 아닌데 …. 여성단체한테서는 하도 욕을 많이 먹어 사진 속 인물들한테 참 미안했습니다.”

-사진을 거꾸로 읽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여성이 힘든 사회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아저씨 본위의 사회죠. 아줌마들에게선 전형성이 읽힙니다. 꽃무늬 스카프, 눈썹 문신, 진주목걸이 등의 코드가 있고, 보험 아줌마, 요구르트 아줌마, 시장 아줌마 등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전형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남편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줌마들한테서 보이는 불안함은 그런 얇은 정체성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소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을 한번 더 보세요. 제가 여성을 건드리는 것은 우리나라가 아저씨, 오빠의 나라임을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그는 이쯤에서 화제를 바꾸고 싶어했다. 종이를 꺼내 ‘아줌마 사진’이라고 쓴 뒤 사람들은 아줌마에 강세를 두고 자신을 바라본다면서, 자신은 사진에 강세를 둔 사진가라고 말했다. 달을 가리키는 손을 봐달라는 것이다.

“저는 명백한 슬픔, 사회적인 소외 문제를 담는 데는 관심 없어요. 그런 건 다른 사람들이 무수히 해왔어요. 제 관심은 경계인입니다. 가정인도 사회인도 아닌 아줌마, 여인도 아이도 아닌 소녀, 전문연예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화장법 등이죠. 현대사회는 이처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제 사진은 새로운 개념의 다큐입니다. 저를 센세이션 지향자, 취약지점 공격자로 읽는 것은 부당합니다.”

-오 교수의 사진에는 전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본디 전략입니다. 제 전략은 낯설게하기예요. 소녀 사진의 경우 증명사진을 크게 확대해 디테일을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대상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익숙할 것 같은 소녀 사진을 크게 하니까 모공, 솜털, 뾰루지, 서클렌즈, 서툰 화장 등 다 드러나지 않습니까? 아줌마 사진에서 플래시를 쳐 배경을 어둡게 한 것은 고립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이마 윗부분 여백을 잘라낸 것도 일부러 불편하게 만든 거죠. 저는 구도에 스토리를 담는 게 아니라 디테일이 스스로 말하게 합니다.”

-인물사진가로 어려움은 없습니까?

“인물사진가는 천형과 같아요. 소나무나 도자기는 안 덤빕니다. 제 사진이 불편한 것은 사람이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 사진이 잔인하고 실제 못된 면도 있지만 저는 제가 옳다고 봅니다. 미학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상쇄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저는 적어도 소재를 가지고 장난치지 않습니다. 12년 동안 세번밖에 전시를 안 했습니다.”

아줌마, 소녀, 사진을 모두 이야기했는데 뭔가 빠진 듯했다. 바로 ‘사진가’다. ‘사진’과 ‘가’를 이을 차례다. 그는 2%가 부족한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아줌마 작업은 어릴 적 엄마에 대한 기억과 관련돼 있어요. 초등학교 때 한 달 한 번 육성회 날이 되면 곤혹스러웠습니다. 다른 엄마들하고 달리 우리 엄마는 두꺼운 화장에 한복을 입고 오셨어요. 싼 한복은 번쩍거렸고 긴장한 탓인지 두꺼운 화장이 번질거렸습니다. 그게 슬펐습니다. 그 다음부터 번쩍거리는 것은 다 싫었어요. 아줌마 작업할 때 보니까 본질이 피부의 번쩍거림이더군요.”

-이태원에 스튜디오를 마련한 이유는 뭔가요?

“6살부터 이태원에 살았어요. 여기는 제 놀이텁니다. 옛날 이태원은 지금보다 험악했어요. 바로 이 골목에 살았는데, 여길 ‘후커스 힐’(창녀 언덕)이라고 불렀습니다. 골목 앞에 출입을 통제하는 ‘레드존’ 표지판이 있었고 헌병이 순찰을 돌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국내 못 들어온 영화를 미8군 부대 안에서 다 봤죠. 저는 어려서 이태원 키드였고 사진의 출발도 이태원입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처음 작업한 것도 이태원시리즈였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우연이었습니다. 원래 영화감독이 꿈이었어요. 미국 유학도 영화 공부하러 간 거였습니다. 갔다가 영화학교 시험이 1년 늦어지는 바람에 그냥 사진학교에 갔습니다. 사진 하면 찐빵 모자 쓰고 바위틈에 여자 뉘어 놓고 누드 찍고 하는 것을 연상해서 ‘내가 저걸 왜 해’, 했죠.”

그는 아직 영화감독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감독 되면 찍으려고 쓴 시나리오도 3편이나 있다고 한다. 그가 가장 먼저 찍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젊은 힙합 댄서인 남녀 4명의 이야기다. “형제 중 한 명이 이근안한테 당했다는 것을 알고 이근안을 잡아 사흘 동안 고문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물론 이근안씨가 잡히기 전의 이야기다.

4시간 넘는 인터뷰 동안 그가 가장 많이 말한 단어는 ‘솔직히’란 부사였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 세계,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긴 오해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는 후련해하는 듯했다. 한국에서 인물 사진을 찍는 것, 그건 아직은 쉽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임종업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