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투스 혹은 푼크툼-소외론

글. 진동선

한 장의 사진을 사랑할 때, 또는 그 사진이 나를 어지럼힐 때, 나는 그것 때문에 머뭇거린다. 그 사진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내내, 나는 무엇을 하는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탐색한다. 그렇다. 한 장의 사진을 사랑할 때, 또 그것이 무엇인가를 어지럼힐때, 우리는 그 이유를 탐색하게 된다. 이게 정녕 무엇이며. 또 내게 무엇을 송신하는가를. 이처럼 한 장의 사진이 속내를 모르도륵 가면을 쓴 채 불쑥 찾아 올 때면 우리는 당혹감을 넘어 혼란스러울 때가 너무도 많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진이 전부 ‘소외’라는 생각을 갖는다. 제한된 프레임은 전체 공간성에 대한 소외이고, 짧은 순간은 영속적 시간성에 대한 소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진이 무엇보다도 소외인 것은 현실이 아니면서도 현실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복제 혹은 재현이라는 이름의 이 지독한 소외는 사진의 숙명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처연한 소외성을 갖는다. 사진의 소외를 가장 잘 대변하는 말 중에는 게스투스(gestus)라는 것이 있다. 게스투스는 라틴어로 태도, 몸짓을 뜻하는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사람이 취하는 운동, 행위, 표정, 언어, 억양 등을 나타내며 개인의 성격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일종의 ‘제스처‘와 같은 의미이다. 연극에서 특히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게스투스는 연극의 최소단위로서 전체의 부분 그 세부적인 묘사로서 소외성을 대표한다.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흔히 얘기되는 ‘소외효과’ 또는 ‘소격효과’는 바로 게스투스를 통해서 전개되는 <낯설게 보여지기>이며, 이는 사회적 태도, 사회적 몸짓으로서 수많은 서사성의 압축이자 의미의 덩어리이기도 하다.
사진에서 소외효과가 발생한 순간은 게스투스를 통해서 의미가 전해질 때이다. 때문에 사진에서의 게스투스는 주로 어떤 장면이 낯설게 보여 질 때나 해석이 곤란할 때인데 외시적이건 공시적이건 언제나 보는 자에게 소외성을 일으킨다. 바로 이 점에서 게스투스는 ‘현실묘사‘의 방법이라기보다는 ‘현실파악’의 방법이 되고 또 그것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될 때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진적 표현과 특성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의미’ 일 경우가 많다.
브레히트가 일상적이고 인습적인 부분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통찰하도록 게스투스를 활용했다면 이와 유사하게 관심을 집중시켰던 또다른 소외성은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punctum)이다. 바르트의 푼크툼은 아주 작은 세부를 지칭하는 말로서 마치 핀으로 한 점이 찔린 그 미세한 부분처럼 전체에 대한 작은 일부분으로서 시각적 소외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롤랑 바르트식의 사진읽기라고 말해지는 푼크툼은 일단 사진의 전체성, 즉 바르트가 ‘스투디움‘이라고 표현했던 전체 장면에서 소외된 그 무엇들, 이를테면 관람자로부터 주목받지 못한 단절된 기표이다. 이처럼 너무도 부분적이어서 관심에서 벗어나 버린 소외성을 다룬 것이 ‘푼크툼’인데, 게스투스와 마찬가지로 전체보다는 부분, 주체보다는 객체, 중심보다는 주변에 관심을 두는 의미작용이며, 그것이 미적이든 이데올로기적이든 부분적이지만 거기에는 주목할만한 사회성과 문화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 우리 앞에 오형근의 사진 <루지애나 경찰>(1991)이 있다. 나는 일찍부터 오형근의 사진에서 브레히트의 게스투스적인 요소와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적인 요소를 생각때 왔는데, 이것들은 그의 최근작 ‘아줌마‘시리즈에서도 변함 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미국에서 찍었던 아버스 식의 포트레이트사진도 그럴고. 학실한 독자성을 구축했던 한국의 아줌마 사진도 그렇고, 거기에는 외시적이면서도 공시적인 분명한 ‘소외성’이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의 사진이 낯설든 친밀하든 브레히트적이고 바르트적인 사진읽기가 요청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영화를 전공했다는 사실과 그가 사진적인 요소에 민감하게 조응해 왔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루지애나 경찰>은 사진의 소외성에 대한 아주 적절한 본보기이다. 따라서 이 낯선 한 장의 사진을 이해하는 일은 연장선상에 있는 최근작 ‘아줌마‘시리즈를 해석하는 단초적 성격을 갖는다. 이제 사진을 보도록 하자. 낯설지 않고 평범해 보이는 미국 경찰의 포트레이트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면 어둠 속에서 유난히 강조된 디테일한 얼굴과 왼쪽 가슴에 빛나는 뱃지, 그리고 춤을 추는 제복의 하얀 라인과 저 멀리로 사라져 가는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온다. 배경분리를 위해 작가를 의도적으로 스트로보를 사용하고 그 순간적인 발광성으로 인하여 사진 속의 공간은 이중으로 분할되어 강한소외효과를 만든다. 이처럼 인위적이고 의도된 무대설정은 연극적인 게스투스의 본보기이다. 게스투스에 의해 작동되는 이러한 소외성은 경찰의 표정과 자세에서 정점을 이룬다. 흐트러짐 없는 완고한 자세, 뭉툭한 코, 카메라 쪽으로 당당히 돌아선 모습에서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와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읽게 한다. 이처럼 경찰이 정형화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구체화된 사회적 단위(또는 사회적 최소단위)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적 테두리 속에 존재하는,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늘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는 그 흔하디 흔한 문화적 일상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래서 소외되고 말지만.)
<루지애나 경찰>에서 또 다른 소외성은 푼크툼적 요소로서 단연 반짝이는 뱃지와 신분을 말해 주는 견장이다. 주인공의 사회적 위상, 살아온 흔적을 말해주는 이같은 상징적 기제는 당연히 우리를 찌르는 푼크툼이다. 왼쪽 가슴에서 플래쉬의 불빛을 받아 명멸하는 뱃지는 사회성을 읽게 하는 기표이며, 왼쪽 어깨의 견장은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강력한 공시성이다. 이처럼 뱃지와 견장은 전체가 아닌 부분이지만 푼크툼으로서 확장된 힘을 갖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환유적이다. 이렇게 보면 소외된 기표들이 이데올로기의 외연이자 궁극적으로는 인물이 담보하는 미시적인 표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최근작 ‘아줌마’시리즈에서 보여준 <진주 목걸이를 한 아줌마>, <팔짱을 낀 아줌마>, <꽃 부로우치를 한 아줌마>사진들 역시 이러한 미시적인 이데올로기로서 확장된 환유성이라 말할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에서 게스투스적이고 푼크툼적인 요소를 읽는다는 것은 거듭 말하지만 사진이
국 현실의 단면으로서 소외성을 자각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진이 알기 어려운 정보적 층위를 갖는다면 그것은 소외된 상징적 층위 때문이다. 따라서 한 장의 사진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할 때 그 대안을 찾는 방식으로서 우리는 게스투스와 푼크툼을 찾고 읽어야 할 경우가 적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