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과 애매함의 결합

-불확실한 존재에서 소녀연기까지
진동선, 사진비평

사진을 매체로 다룬 사람 중에는 자신을 사진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영역의 의미를 배제한다면 카메라를 사용하고, 카메라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사진적 프로세스를 거쳐 이미지를 손에 쥐는 데도 이런 상반된 정체성을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분명 같은 재현의 툴을 사용하고, 같은 세상 앞에 서고, 같은 프로세스를 사용하는데도 서로 다른 포지션에 있기를 바란다면 어딘가에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들은 사진의 본질에서 찾아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진의 본질은 세상에 대한 반영에 있다. 또 그것은 세상을 드러내는 가시성의 발현 속에 있다. 회화에 회화의 본질이 있듯이 사진에도 사진의 본질이 있다. 사진이 사진일 수 있는 것은 세상을 향한 반영의 틀거리를 가질 때, 그리고 그것들이 명백하게 사진 안에서 반영의 본질을 가질 때 사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구체적으로 사진의 본질이고, 또 무엇이 사진적인 가시성을 획득하는 것인지 이런 물음에 대해서 아마도 가장 적절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오형근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형근의 사진적 태도와 사진들은 여느 사진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사진의 본질과 사진적 재현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리고 명시적으로 말해왔던 사람이다. 특히 그는 사진이 사진일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반영의 문제를 거론해왔다. 사진이 매우 사적인 반영의 결과물이라는 사실도 말해왔다. 마치 바르트가 사진을 단 한사람만을 위한 불완전한 과학이라고 했던 말과 맥락이 같다. 사진은 확실히 삶으로부터, 그리고 현실로부터 취해진 어떤 존재들의 반영이다. 그러니까 사진의 본질은 실재성으로부터 배태된 어떤 존재들의 자국(퍼스) 혹은 존재들의 얼룩(바르트)이다. 그런데 이 반영물은 늘 불안전한 모습이다. 오형근의 말처럼 애매함과 모호함을 동시에 수반하고 있다. 사진은 애매함을 감춘 시간예술이다. 사진의 본질은 그 애매함 속에서도 순간을 반영하는데 있고, 그리고 그것들을 스스로 누설하는 반영의 본질 속에 있다.

애매함을 위한 미적 거리

오형근은 지금까지 세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첫 번째 전시는 1993년 최 갤러리에서 열린 불확실한 존재(Uncertain Presence)였고, 두 번째 전시는 1999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아줌마였으며,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소녀연기가 세 번째 전시다. 세 차례의 전시지만 그는 매우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일관되게 그리고 개성 있게 사진의 본질에 입각한 미적 거리와 재현의 가시성을 보여준다. 여고생을 모델로 했던 이번 소녀연기는 지금까지 추구했던 사진적 방법론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확장된 사진성(寫眞性)을 보여준다. 사진의 주요 미적 코드가 “반영(Reflection)이다. 이 반영의 문제는 오형근의 사진에서는 중요하다. 그것들은 ”애매함“과 결합한다. 따라서 반영과 애매함은 오형근의 사진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고, 또 이것들은 미적 거리와 가시성을 결정하는 주요 잣대이기도 하다.

오형근이 여느 사진가보다 사진의 본질에 다가섰다고 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그가 만들어낸 미적 거리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재현의 가시성은 우리를 이 지점으로 이끈다. 그래서 오형근의 사진은 이런 물음을 허락한다. 사진들은 무엇을 위한 반영인가. 모델이었던 아줌마 혹은 여고생은 어떤 반영의 상징이며, 이들이 펼친 연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카메라 앞에 선 대상들은 어떤 존재들의 자국이고 어떤 얼룩인가. 이것들은 사회와 문화 속에서 어떤 반영의 결과물로서 자리하는가. 그런데 이런 질문들은 자칫 그의 사진을 왜곡할 소지가 있다. 또 작가의 의도보다는 스타일에 함몰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모델을 통해서 반영하고자 했던 작가의 감춰진 의도들, 즉 주요한 사회와 문화적 발언들이 간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형근의 사진은 앞서 언급했던 질문들을 용해시키지 않고서는 나가기 어렵다고 본다. 이것들은 바로 사진의 중요한 본질이고, 또한 그의 사진의 이미지 수사학이기 때문이다. 아줌마와 여고생이라고 하는 사회적 아이콘들은 이미지 수사학 속의 연기자다. 즉 반영을 위한 롤 모델(Role Model)들이다. 불확실한 존재, 아줌마, 소녀연기는 사진의 본질을 미적 거리로 두고자 했던, 그리고 가시성에 두고자 했던 의도된 디텍팅이다. 연출 과정에서 구축된 전략들은 미적 거리와 가시성을 연동시킨 바로 캐스팅(Casting), 파사드(facade), 게스투스(Gestus), 푼크품(Punctum)이다. 이것들은 그의 이미지 수사학에서 매우 주요한 코드로 자리한다.

가시성을 위한 반사와 빤짝임

그렇다면 사진의 본질, 반영의 본질이 되는 미적 거리는 무엇인가. 또 “애매함”이 미적 코어라고 했을 때 어떤 모습으로 그것들은 가시성과 연동하여 미적 거리를 경계 짓는가. 이것들은 오형근의 사진적 방법론에서 첫 번째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사진에서 가시성의 실체가 무엇보다 애매함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애매함은 작가의 내적 컨텍스트로부터 나온다. 그는 삶에서도 상당히 경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그는 인사이더(Insider)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비사교적이고, 아웃사이더(Outsider)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비전투적이다. 이렇듯 삶에서의 거리두기가 그에게는 모델과의 관계, 미적 거리, 가시성까지 개입하며, 이러한 거리두기가 궁극적으로 사진의 본질 안에서 가시성으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한다.

오형근의 사진에서 눈에 띠는 가시성의 요소는 무엇보다 ‘반사’와 ‘빤짝임’이다. 반사와 빤짝임은 불확실한 존재와 아줌마에서 매우 중요한 가시성으로 자리했던 요소다. 첫 번째 프로젝트였던 “불확실한 존재”는 미국 유학중에 찍은 사진이다. 대상과 어떻게 미적 거리를 가져야 하는지 반사와 빤짝임을 통해서 보여준 대표적인 사진이다. 두 번째 프로젝트 “아줌마” 사진 역시 강화된 반사와 빤짝임을 통해서 대상들의 미묘한 갈등구조를 드러낸 대표적인 가시성의 사진이다. 이번에 선 보인 소녀연기 또한 앞의 두 프로젝트에 비해서 반사와 빤짝임은 드러나지 않지만 배경과 모델들이 보여주는 반사의 코드들은 여전히 가시성의 층위들을 보여주고 있다. 반사와 빤짝임이 있기에 오형근의 사진에서는 미적 거리가 규정된다. 또 이 미적 거리가 물리적 특장이기 되기도 한다. 플래시에 의해 순간적으로 얻은 맞은 주체들의 얼어붙음, 그리고 그 순간 날아오는 반사와 빤짝임의 기표들. 이렇듯 그의 사진은 빤짝임을 통해서 가시성이 극대화 된다.

역할 연기를 위한 캐스팅

오형근에게 사진적 교본(Role Model)은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다. 그녀는 대상을 향해 곧장 플래시를 터트린 작가다.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사진은 비밀에 관한 비밀이며, 비밀은 사진적인 감각과 코드를 통해서만 누설된다. 그 방법은 바로 플래시다.”(1971) 누설의 코드가 플래시라는 것은 반사와 반사로부터 생겨나는 그림자, 그리고 그것들을 매개하는 빤짝임이다. 물론 존재론적으로 대상들이 삶을 반영할 수 있는 반사체를 가져야 한다. 오형근은 이것들을 캐스팅을 통해서 구축한다. 삶을 반영하는 반사, 그리고 반짝임. 이것들은 캐스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불확실한 존재는 애매한 경계선에 서 있는 미국의 아웃사이더를 향해 플래시를 터트린 반사와 빤짝임이었다. 아줌마는 속칭 제3의 성으로 불려지는 이 땅의 아줌마를 반영하기 위해 플래시를 터트린 반사와 반짝임이다. 전략적 캐스팅, 적절한 가시성만이 반사와 빤짝임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다이안 아버스가 그랬듯이 오형근도 반사와 반짝임을 염두에 두고 캐스팅했다. 그러나 반사와 빤짝임은 매우 개인적인 가시적 상징물이다. 불확실한 존재가 그랬고, 아줌마가 그랬다. 모두 사적인 반영의 결과물이고, 사적인 드러남이다. 마음에 있는 이미지 수사학에 따라 모델들을 발견했을 때 순간 캐스팅되는 사진이며, 마음에 내재한 롤 플레이에 따라 모델들이 오다가다 캐스팅되어 가시성이 극대화되는 경우이다. 이번에 선 보인 소녀연기 역시 이전 저런 이유가 있지만 가시성을 위한 전략적 캐스팅이다.

전면성으로서 파사드

오형근의 사진은 모델들이 전면성(前面性)을 향한다. “파사드”를 위한 전략이다. 그의 파사드는 전면성이다. 심리적인 형상성을 위하여, 또 모델과 작가의 관계, 나아가 모델과 관객을 위하여 전면성을 부각시킨다. 전면성이 강화되기에 전면에 있는 반영체들은 플래시를 맞고 빤짝인다. 또 전면성이 강화되기에 사진의 본질이 되는 가시성과 미적 거리가 강조된다. 전면성의 파사드는 그의 사진에서 매우 중요한 본질이 되고 있다. 전면성의 결과로 가시성과 미적 거리를 형성되고, 시선의 정점을 투사(投射)인가 반영(反影)인가로 구분되고, 모델의 ‘역할연기(Role Play)’가 한층 빛을 말하는 강렬성을 이끌어 낸다.

소녀연기는 캐스팅과 파사드의 합작이다. 이전의 사진적 방법들에서 한발 짝 앞으로 나간 전략적 방법론이다. 소녀연기에서 특이한 것은 이중 프레임이다. 이중 프레임에 작가는 연극적, 영화적 요소인 게스투스를 강화한다. 게스투스는 브레히트 연극에서 강조되는 작은 세부 동작이다. 소녀연기에서 여고생들은 프레임 A와 프레임 B사이, 커트와 커트 사이에서 가시성이 강화된다. 더블 프레임에 나타나는 미세한 동작의 차이는 역할 연기로서 곧 현실 파악의 가시성을 증폭시킨다. 교복의 유형성, 다리를 꼬는 것, 다리를 어긋지게 하는 것, 유니폼으로 애매함을 갈무리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재현의 가시성을 높이는 또 다른 반사이고 빤짝임이다. 모두 꾸며진 가시성이지만 커트와 커트 사이에서 모델과 사진가간의 물리적, 심리적 균열을 보여준다. 프레임 A와 프레임 B 사이에서 미적 거리는 결국 전략적인 게스투스의 활용이다. 두 개의 프레임, 두 가지의 포즈를 나타나는 소녀연기는 사실 서로 다른 포즈가 아니다. 연속된 포즈,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휴지(休止)이며, 커트와 커트 사이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심리적인 균열이다. 이 균열이 바로 사진가와 모델간의, 또는 모델과 관객간의 미묘한 관계를 탐색하게 만든다.

특정 세부를 위한 푼크툼

오형근의 사진에서 마지막 가시성은 푼크툼이다. 그러나 그의 푼크툼은 바르트의 푼크툼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화살처럼 날아와 상처를 내는 어떤 찌름의 푼크툼이라기 보다는 공유하기 힘든 반영의 애매함이 특정 세부로 나타나는 푼크툼이다. 오형근은 이러한 푼크툼적인 요소들을 꽤 일찍 수용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가시성과 연계시켰다. 불확실한 존재에서는 모델들이 아웃사이더이면서도 주류 태도들을 흉내 내는 복장, 태도, 스타일의 푼크툼이 되고, 아줌마에서는 모델들의 걸치고 있는 목걸이, 안경, 가죽옷이 푼크툼이 되어 정서적으로 모호한 아줌마를 반영했다. 이번 소녀연기에서의 푼크툼은 교복을 통해 나타나며, 또한 신발, 가방, 거울 같은 것들을 통해서도 반영된다. 소녀연기에서는 특히 유니폼 자체가 강력한 반영의 푼크툼이었다.

오형근의 사진에서 반영의 모델이 된 아줌마, 여고생은 어떤 존재들일까. 그러나 아줌마 사진에서 그러했듯이 여고생 사진에서도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일지 모른다. 성의 코드, 욕망의 코드, 관음의 코드, 소비의 코드, 심지어는 원조교재의 코드가 여고생의 이미지에 얼마나 적용 가능할 것인지 의심스럽다. 어쩌면 그것들은 지나치게 사회문화적 코드들이어서 상투적이거나 선입견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코드로도 오형근이 반영한 여고생 이미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다이안 아버스가 “발자국은 신발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신발 자체는 아니다”(1959)라고 했던 것처럼, 오형근 역시 “우리가 아는 소녀는 전면일 뿐이고 이미지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소녀연기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스스로 누설할 뿐이다. 사진의 본질은 스스로 누설하는 반영 자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