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스틸사진’

백지숙 (미술평론가)

 

지금도 찾아보면 가족앨범 어딘가에 꽂혀있겠지만 아직 동생이 태어나기 전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 한 장을 앞에 놓고 한참을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단란한 가족사진을 두고 어린애가 왠 청승이었는지, 성장하는 내내 그 사진이 던졌던 질문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때는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한 남동생이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형태에서 행복한 가족의 이상을 찾으려했던 둘째 딸 특유의 콤플렉스 때문인가 했다. 또 국민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에는 그 울음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전조였던가 자책감을 갖기도 했다. 물론 더 자라서는 아버지의 실제 죽음보다 ‘사진의 죽음’이 훨씬 먼저라는 사실을, 모든 사진은 ‘탄생’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죽음을 예비경험하게 함을, 알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사진에서 느꼈던 슬픔이 앞서 거론한 이유들, 예컨대 사회심리, 주술, 사진미학의 근거들 모두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진에서 느끼는 정서의 크기는 그것에 대한 설명의 합을 훨씬 뛰어 넘는다. 사실 사진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기호(sign)의 입자들은 계속해서 정박을 거부하며 헤쳐모여!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오형근의 인물사진이 낯설게 보이는 것은, 사진에 대한 이러한 나의 원체험과 어긋나는 국면에서 그의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그는 그냥 길거리에서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아줌마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특정한 연령과 성과 계층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한국 특유의 사회적 존재들로서 최근 몇몇 문화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편에 속한다. 특히 30대 중반을 넘은 나로선 아줌마라고 불리는 순간, 의연한 척 하지만 실은 약간의 상처를 남게되는 그런 호칭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것이 특별한 악의 없이 ‘객관적’으로 선택된 것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 상처는 좀 더 오래가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아줌마란 필연적으로 동화나 공감보다는 그로부터의 탈피나 이화를 요구하는 호칭의 카테고리인 것이다. 이는 어머니라는 호칭에 수반되는 그 끈끈한 양가감정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한편으로 오형근의 사진 가운데서 내 친구의 어머니와 꼭 닮은 인물을 발견할 때, 나는 아줌마란 가까운 친지를 가리키는 호칭임을 깨닫는다. 어머니의 친한 친구에 대한 호칭인 이모와 친한 친구의 어머니를 부를 때의 어머니, 즉 가짜이모나 가짜엄마는 분명 이 아줌마의 스펙트럼 안에 위치한다. 아줌마의 그 부정적인 함의를 떨어내기 위해서 비록 혈연이나 결혼에 의해서 맺어진 가족관계는 아니지만 이모와 어머니라는 호칭을 대용代用하기로 우리는 합의했던 것이다. 결국 누군가의 어머니임에 분명할 이 모든 아줌마들을 어머니가 아니라 아줌마로 보기로 결정한 것, 여기에 오형근 사진의 교묘함이 숨어있다. 그는 어머니 아닌 아줌마를 통해, 가족 아닌 친지를 통해, 사진 아닌 ‘가짜사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나아가 사진에 대해 새롭게 말하기로 한다.
우리 일상 속에서 사진은 그 자체로 가족 또는 가족에 대한 기억과 동의어다. 특히 철저하고도 급격한 붕괴와 급격하고도 부실한 신축新築으로 점철된 근대화 과정 속에서 (대)가족의 해체와 (핵)가족의 대체를 함께 경험했던 우리에게 사진만큼 효과적인 기억의 대응물은 없었다. 시골집 안방머리에 걸려 있는, 여러 장의 가족들 사진을 끼워 넣은 액자로부터 결혼 필수품목이 된 고급양장본 결혼앨범에 이르기까지 사진은 단순히 가족에 대한 소속감을 높일 뿐 아니라 거친 일상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의지의 보루로써 기능해 왔다. 또 이산가족의 푯말 위에 붙은 낡은 흑백사진에서부터 사진관 쇼룸에 진열된 ‘테마형’ 가족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은 가족에 대한 상상적인 공동체감을 높이고 그 이상형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사진에 대한 나름대로의 절실하고도 강력한 체험이 사진일반에 대한 수용방식을 상당부분 결정해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는 말은 그런 점에서 사진에 관한 우리자신의 솔직한 고백이다. 한국적인 맥락에서 사진은 일상세계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거꾸로 세계에 대한 반응을 고착시키는, 일종의 접착제 구실을 한다. 아마 여기만큼 사진 그 자체와 그것과 마주서 있는 세계 사이의 결속감을 굳세게 자랑하는 지역도 드물 것이다. 예컨대 요즘 아이들 다이어리 뒷장을 차지하고 있는 수 십장의 스티커 사진들도 그 결속감의 증거물에 다름 아니다.
이 지점에서 오형근의 사진은 다시 한번 낯설게 다가온다. 그의 아줌마 사진에는 ‘죽어버린 순간’을 감지하면서 느끼게 되는 서글픔, 지나간 세월에 대한 진한 노스탤지어, 인물의 생애에 대한 자연스런 연민과 공감 등 가족사진을 통해 우리가 철저하게 연습했던 정서들이 배제되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정서들이 일찌감치 ‘철회’되어 있다. 그 흔적은 남아있으나 이미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태도, 의도된 냉담함을 그는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의 아줌마 사진에는 우리가 가짜이모 혹은 가짜엄마를 부를 때의 그 태도가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사실 우리는 그들을 대단히 친밀하게 부르지만 한참 세월이 흐른 뒤 거리에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내심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화된 거리’로 인해서 그가 ‘재현’하는 아줌마들은 대단히 익숙한, 데자 뷔의 얼굴을 하고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낯설고 기이한,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다. 이 내면화된 거리가 한국작가들의 다른 인물사진들과 그의 아줌마 사진을 특별히 갈라보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형근 사진의 매력은 그 동안 사진의 대상으로 부각되지 못했던 우리사회의 특이한 존재를 발탁해서 이를 나름의 스타일로 제시한다는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무엇을 찍느냐하는 문제와 어떻게 찍느냐하는 문제를 분리하여 취급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이 아줌마를 찍은 사진이 아니라 아줌마의 기호들에 관한 것임을 발견하게 될 때 이 문제들은 저절로 해소된다. 그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가 액서서리, 의상의 무늬와 질감, 헤어스타일, 화장법 등 우리가 아줌마로 지칭하게 만드는 각종 구성요소들을 정력적으로 모으는 수집가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수집된 데이터와 함께 얼굴의 주름이나 표정을 분류하여 아줌마의 성벽과 가족관계와 직업을 가늠하게 하는 예리한 관상학자임이 드러난다. 심지어 이런 유형화를 통해 아줌마들의 한을 풀어 주고 다소간 미래까지 점쳐 줄 수 있는, 상당한 적중률을 자랑하는 점술가인 듯도 싶다. 물론 그가 이렇게 ‘찍어낸’ 아줌마들이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실제 아줌마의 범주에 속하는지 혹은 그가 보험외판원으로 분류하는 아줌마가 정말로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렇게 보기로 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는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얻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짜이모와 가짜엄마들을 겨누고 있는 그의 사진은 확실히 가짜사진이기도 하다.

한편 보편과 개별, 특수와 일반을 교차시키는 그의 유형학은, 사진을 통해 곧잘 단련되곤 하는 차이와 동일성의 변증법으로 다시 연계된다. 가령 그의 작품 [두 아줌마 1)은 다이안 아버스의 [쌍둥이]를 정확히 뒤집은 지점에 위치한다. 아버스의 사진이 생물학적 대칭(symmetry)에 흠집을 냄으로써 동일성의 범주 안에서 숨죽여있던 차이의 목소리를 살려내고 있다면(주1), 자매처럼 보이지만 실은 남남인 이 아줌마들은 차이를 관통하고 있는 ‘사회적 유전자’를 발견하게 만든다. 연령과 신체와 명암의 측면에서 비대칭 관계에 놓여져 있는 이 아줌마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경질적인 눈매와 입가의 주름과 번들거리는 화장기는 동일한 삶의 이력을 추적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또 [두 아줌마 1] 옆에 다른 작품 [검은 뿔 테 안경을 낀 아줌마]를 나란히 놓고 다시 그 옆에 [두 아줌마 2]를 놓을 경우 이 단서는 계속해서 보강된다. 이런 이미지의 연상은 한편으로 개성적인 인격을 무효화시키고 있는 유형학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폭로하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권한을 넘어서는 어떤 공통의 사회적 경험들을 순간 응축시킨다. 아줌마 사진과 달리 아저씨를 찍은 사진이 실패할 확률이 높은 이유는 그것이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해석으로보다는 개성의 표현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아가씨 사진의 범주가 성립되기 힘든 까닭은 사회적 시간이 사람의 신체 속에 남기는 뚜렷한 자취와 그것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는 공통의 경험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아가씨의 팽팽한 얼굴에서는 주름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아가씨들과 달리 아줌마들은 세계와 대면할 때의 긴장감, 그 중에서도 특히 심미적인 긴장감이 완전히 늘어져 있는 상태에 있다. “뭉쳐있는 빠마머리와 후줄근한 긴치마, 그리고 찍찍 끌고 다니는 쓰레빠”는 그 긴장감의 상실을 단적으로 지시하는 기호들이다. 오형근은 바로 그 심미적 긴장감을 상실한 아줌마들을 완전한 심미적인 대상으로 재구성한다. 특히 그는 아줌마들이 위치하고 있는 개별적인 맥락은 사상시키면서 잔뜩 성장盛裝한 그들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대부분 그의 작품에서 배경과 아랫부분은 어둡게 떨어져 있고 얼굴 부위에 강한 조명이 집중됨으로써 부자연스러운 화면분할이 생겨난다. 이 때문에 화면은 전체적으로 평평해지고 부분적으로 조각이 나며 또한 모호하게 중첩되기도 한다. 결국 이 공간은 우리에게 ‘종합적’ 원근법 대신 ‘분석적’ 원근법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주2). 전후좌우가 ‘페이드 아웃’되어 있는 장소 위에 불쑥 솟아있는 이 아줌마들의 반신상半身像은 무엇보다 그들의 고독하고 막막한 존재감을 드러내준다. 그런가 하면 화면 여기저기 산포되어 있는 모조보석들의 광채는 아줌마들의 ‘순정’을 노래하고 있다. 반면에 재킷에 남아있는 보푸라기나 유행이 한참 지난 블라우스의 무늬와 질감은, 미처 화장으로 가리지 못한 목부위의 도드라진 주름처럼, 도저한 일상의 힘을 자각하게 해준다.
그러나 정작 화면 위에 떠있는 아줌마의 얼굴에 눈을 맞추는 순간 나는 잠깐 멍해진다. 작가가 어떻게 아줌마 모델들을 ‘무장해제’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자신의 전존재를 전혀 가감 없이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흔히 카메라와 대적할 때 갖게 되는 그 팽팽한 긴장감, 자기 정체를 렌즈에 결코 포획 당하지 않겠다는 식의 확고한 의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 젊은 신부들이 똑같은 결혼사진의 시나리오에 따라 화려한 주인공 역할을 연기할 때의 그 안간힘과 어색함, 그리고 그것조차 지워버리려는 노력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나간 젊음에 대한 회한도 현재의 다른 젊음에 대한 질투도 그렇다고 늙어 가는 자기 얼굴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이, 이들은 아줌마로서의 자의식을 과감히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아줌마에 대해 은연중 갖고 있던 사회적 ‘혐의’가 무너지면서 해석의 가닥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나에게 화면의 구성장치는 하나의 지침이 돼준다. 우선 부피가 없는 평평한 화면구성은 아줌마 자의식의 두께없음에 정확히 일치되고, 한편으로 어둡게 처리된 외곽 면은 화면 안에 또다른 액자-프레임이 설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사진이 아줌마에 관한 메타담론으로서, 이를테면 영화의 스틸사진 같은 것은 아닌 지 생각하게 한다.
수잔 손탁은 사진에 찍힌 세계와 현실세계와의 관계는 스틸사진과 영화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부정확하다고 말했다. 생활은 일순간 비춰져서 영원히 정착되는 그 중요한 세부에 의해서 좌우되지는 않지만 사진은 바로 그것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주3). 이와는 또다른 맥락에서 오형근의 사진은 말 그대로 스틸사진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것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가상의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찍은 스틸사진인 셈이다. 물론 이 때의 배우들은 배우로서의 자의식 과잉으로 인해 종종 ‘오바’하는 스타들이나, 배우로서의 연기력 이외의 부담 때문에 항상 억눌려 있는 국민배우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경찰청 사람들]이나 [긴급구조 119] 등의 재연코너에 자주 나오는 무명의 주연배우들 경우처럼, 단역전문 배우이거나 아마추어 연기자들이거나 아니면 실제 직업인들이라 할 수 있다. 오형근 ‘스틸사진’ 속의 아줌마 배우들은 자신들이 드라마 속에서 맡은 역할과 실제를 다소간 구분하지 않은 채, 나름대로 리얼하게 연기할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삶의 리얼함을 누설하고 있는 특이한 성격의 배우들인 것이다.
결국 그의 아줌마 사진은 ‘아줌마’ 사진이 아니라 아줌마 ‘사진’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그의 사진과 만날 때 나는 가족사진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르게 흥미진진한 기운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무래도 가족사진은 가족 ‘사진’이기 보다는 ‘가족’ 사진인 경우가 많고, 그런 종류의 가족사진이나 그와 유사한 감상법을 요구하는 사진들이란 어쩔 수 없이 심리적인 부담감을 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형근의 아줌마 사진은 우리를 이런 육친적인 정서로부터 한결 자유롭게 해주고 사진을 그 현실세계에 대한 혈연적인 채무감으로부터 일정정도 놓여나도록 도와준다. 물론 가짜이모, 가짜엄마를 찍은 이 가짜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연마하는 문화적인 감식력이, 과연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주1 “Biology, Destiny, Photography: Difference According to Diane Arbus”, Carol Amstrong, October 66/fall 1933
주2 “Photography’s Discursive Space”, [The Originality of the Avant-Garde and Other Modernist Myths, Rosalind Krauss, MIT press, 1986, p 135
주3 사진이야기, 수잔 손탁, 해뜸, 1986, P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