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연기少女演技’ 에서 ‘화장소녀化粧少女

오형근

소녀들의 초상 작업은 2001년부터 시작됐다. ‘소녀, 소녀를 연기하다’라는 주제 하에 연예연기학원의 여고생들의 모습을 담은 <소녀연기少女演技>는 2001년 여름부터 2004년까지, 그리고 거리에서 만난 소녀들의 화장법을 보여주는 <화장소녀化粧少女>, Cosmetic Girls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작업하였다. 초기에는 소녀를 바라보는 관점이‘아이와 여성’이라는 사뭇 감성적인 경계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욕망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중적인 사회성을 바라보게 되었다. 때문에 <화장소녀化粧少女>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초기 작품 시리즈인 <소녀연기少女演技>의 전개 과정과 작업 배경으로부터 설명을 시작한다.

 

+소녀와 여자

Am.biv.a.lent

- adj. <마음이>

    1. 불안정한
    2. 양면 가치의; 애증愛憎을 함께 느끼는
        종교에 대한 감정의 갈등
    3. 병존竝存하는, 양성적인
n. 양성애兩性愛인 사람

사진 평론가 앤 비티Ann Beattie는 소녀들이 ‘아이와 여성’이라는 양성적兩性的인 성징性徵을 보여준다며 Ambivalent 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나 역시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2001년  여름부터 여고생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여고생들이 Ambivalent한 면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아마도 ‘아이와 여성’이라는 양성적인 구도보다는 ‘소녀와 여성’이라는 좀 더 미묘한 편차로 느껴지곤 했다. 때문에 주로 그들의 손끝과 몸매에 서려있는 여성스런 성장의 징후들과 소녀적인 시선의 교차점을 드러내는데 주력하였다 기본적으로, 나는 이런 모호한 시기에 접어든 여고생들의 정서적인 흔들림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녀연기 少女演技, (2001-2004)

작업 초기에는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여고생들의 모습을 담으려 했으나 미성년자의 초상권 문제로 인하여 작업이 더뎌졌다. 그러나 중반에 접어들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여고생들을 MTM이라는 연예연기학원演藝演技學院으로부터 소개 받으면서 좀 더 자유롭게 작업을 진행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들이 연예연기학원생이라는 특정 그룹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연기나 사진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 없고, 아직은 소녀라는 큰 울타리 안에 있어 여고생이라는 주제에 어긋남이 없어 보였다. 또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녀들의 욕망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는 그룹이라는 면에서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2002년 여름부터 작업이 깊숙이 진행 됨에 따라, 단순히 여고생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이들만이 표출해내는 전면적인 ‘소녀演技’를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TTL 소녀 임은경이 보여주는 슬프고 아련한 눈매일수도 있고 ‘DRAMA’라는 CF에서 이영애가 만들어내는 관능적이고 성숙한 시선일수도 있었다. (나는 이 시선을 물음표 시선이라고 부른다. “나는 몰라요. 세상이 어떤 곳인지…”하는)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자신들을 어떤 느낌의 소녀로 내보여야 주류 연예 문화 속으로 흡입될 수 있는지를 공식처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식은 그들이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화나 TV를 통해서 습득했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짐작 건대, 이 소녀들의 대부분은 거울이나 혹은 스티커 사진기 앞에서 수십 번도 넘게 임은경과 이영애의 물음표 시선을 연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녀들에게 이런 시선을 짓게 만드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아마도 연예 미디어이고 이러한 미디어를 통해서 여고생들이 소녀처럼 순진하고 순결하게 보이기를 바라는 우리들 일 것이다. 이때부터 작업의 주제는 여고생에서 ‘소녀, 소녀를 연기하다’ 라는 틀 아래, <소녀연기少女演技>라는 제목으로 진행 되었다.

 

 

+교복과 그 관음觀淫적인 시선

사실은 교복에 대한 아주 관음觀淫적인 시선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교복은 소녀들을 바라보는 성性적인 코드 중에 하나로 쓰여져 왔다. 그것이 단순히 중년 남성의 음탕한 시선이든 유니폼에 대한 일반적인 성적 환상이든 간에 관음적인 시선이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아주 관능적인 타원楕圓 안에 소녀들의 전신을 넣었고 관음적인 원圓안에 소녀들의 초상을 담았다.

 

+도감圖鑑과 졸업 앨범

인물에 대한 유형학적인Typological접근 방법은 개개인의 특성을 구체화하는 분류 작업으로 보여 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안에 담긴 개체의 아우라를 소멸시켜 익명으로 만들기도 한다. 졸업 앨범과 도감은 이런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2학년 3반에 누구라는 구체성은 있지만, 모아놓으면 그냥 어느 학교 앨범일 뿐이다. 개인은 사라지고 그가 속해 있는 단체가 앞으로 나선다. 이 점은 초상 사진이 한 인물의 내면까지도 드러내는 아주 구체적인 작업이지만, 졸업 앨범처럼 사진적인 형식이 동일하게 반복될 때는 역으로 추상적인 익명성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나는 여고생들이 입고 있는 교복의 특성처럼 개개인의 아우라 보다는 여고생이라는 인물 군 전체의 아우라를 담아내고 싶었다. 때문에 한 화가에게서 전해 받은 오래 된 졸업 앨범이 이 작업의 형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초상에서 추상으로’

+중간 계조 (회색 톤)

기록과 정보라는 측면에서 사진을 생각해보면 중간 계조는 아주 서류적인 객관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감성의 통로로 중간 계조를 읽어보면 연약하고 여리기 때문에 미묘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계조이기도 하다. <소녀연기少女演技> 작업을 시작하면서 기술적으로 가장 먼저 생각 한 것은 중간 계조가 풍부하게 담긴 사진이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 작업은 소녀와 여성이라는 모호한 경계에 있는 인물 군들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때문에 ‘여고생’들이 느끼는 미묘한 불안감과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감성 표현이 뚜렷한 흑과 백의 농담濃淡 보다는 중간 계조가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고생’작업은 <아줌마>나 <이태원 이야기>작업처럼 인물이 밝고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분리 되지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정한 감수성을 굳이 일상으로부터 고립시키거나 격리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초상들이 항시 일상 안에 스며들어 있었으면 한다.

+반복에 의한 연작連作 형식에 대하여

<소녀연기少女演技> 작업을 하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들의 미묘한 감수성이 매 사진마다 소녀少女에서 여성女性으로 순간순간 변한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정서적인 흔들림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반복을 했다. 하지만 이미 유형학적인 접근 방법에서 보여 졌듯이 — 도감이나 졸업 앨범처럼 — 동일한 유형이나 이미지의 단순 반복은 사진 안에 담긴 개체의 아우라를 상실시킨다. 때문에 그들의 표정에서 오는 소녀와 여성의 미세한 감정의 차이를 볼 수 있다면 반복이라기보다는 연작 사진Sequential still처럼 보여 졌으면 하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전면으로 보여주는 소녀연기의 욕망을 상실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낱처럼Tenuous이어지는 그들의 미묘한 욕망을 연작이라는 형식을 통해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소녀시대와 화장소녀 化粧少女, (2005)

 

                             소녀는 욕망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대상이기도 하다.

 

평론가 백지숙씨의 흥미로운 소녀론少女論처럼, 나 역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소녀들이 가지는 ‘욕망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중적인 사회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례로 수많은 삼촌과 오빠들이 2004년 이후에 출현한 다수의 섹시한 걸 그룹들 —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등 — 에게 매혹을 느끼고 있으며 때문에 음반, 영화, 패션 등 연예 문화 전반의 마케팅이 소녀 취향으로 겨냥된다는 현실을 알고 있다면 반론이 없을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2004년의 내 전시 제목 <소녀연기少女演技>를‘소녀시대’로 부른다는 점이다. 사실 상, ‘소녀시대’의 전 멤버들이 ‘소녀연기’의 전문가들인 점을 감안한다면 큰 무리도 없겠지만.) 또한 이 시대의 많은 민감한 소녀들이 이들에게서 소녀성少女性 — 대부분 옷차림이나 화장, 그리고 헤어스타일처럼 외모적인 면이 많지만 TV 토크 쇼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말투나 행동, 혹은 성격까지 — 을 배우고 있으니 ‘소녀연기시대少女演技時代’임은 틀림이 없다. 때문에 2005년부터 다시 거리에 나가 ‘소녀들의 화장법’이라는 주제 하에, 소녀 작업이 시작되었다.

 

+화장소녀 化粧少女, (2005~2009)

동대문 밀리오레, 이대 앞, 신림동 순대 골목, 성신 여대 앞,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등등… 서울 시내 곳곳에서 ‘화장소녀’들을 캐스팅했다. ‘소화법’(녀들의 ) 캐스팅 매니저로 불리어졌던 사진과 여대생 8명의 도움을 받아 약 500여명의 십대 소녀들을 섭외 할 수 있었고 이중에서 기꺼이 내 작업실을 방문해준 138명의 초상 작업이 이루어 졌다. 그리고 이 책에는 총 28 명의 ‘핵심’ 화장소녀들이, 그들이 직접 행한 화장법과 함께 초상으로 실려져 있다. 여기서 핵심이라 하면, 작품 제목에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지역별로 조금씩 다른 화장법과 패션 스타일을 보여 주는 사회적 보고서의 측면을 고려했을 때의 핵심이란 뜻이기도 하다. 사실 시각적인 드라마를 꿈꾸는 사진가의 입장에서 일본의 갸류족들처럼 짙은 화장의 소녀들을 기대했지만 2005년부터 한국의 소녀들의 화장법은 BB크림 위주의 자연스런 피부 톤의 유행에 빠져들어 안타까웠다. 하지만 써클 렌즈나 컬러 렌즈부터 색조 화장과 매니큐어 그리고 페디큐어와 네일 케어를 포함해서 염색과 붙임 머리까지… 소녀들의 화장법은 생각보다 극적이었다. 더구나 보톡스를 이용한 쁘띠 성형과 쌍꺼풀 수술까지, 성인 여성들의 과감한 미용법을 보여주는 소녀들도 간간이 만날 수 있었다. (사실 17세 이하, 청소년들에 성형은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다.) 2009년까지 3년 동안 촬영이 이루어 졌고 촬영 내내 나는 한국이 ‘화장 공화국’처럼 느껴졌다.

+소녀도감少女圖鑑, 소녀유형학少女類型學

애초에 <소녀연기少女演技>시리즈의 제목으로 ‘소녀도감少女圖鑑’ 혹은 ‘소녀유형학少女類型學’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2004년도 한국에서는 원조교제나 청소년들의 성적문란을 지탄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때문에 전시 제목이 너무 도발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기획자의 반대에 부딪쳐 <소녀연기少女演技>라는 모호한 제목으로 바뀌어졌다. 사실 소녀를 도감화하거나 유형화하는 작업은 부도덕하기도 하지만 유형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감성을 배제하고 객관적이며 이성적인 분류를 지켜야 하는 유형학 사진에 ‘소녀’라는 정의는 너무도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화장이라는 주제 역시 유형학적 사진으로 보여지기에는 너무도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화장소녀化粧少女>는 더욱더 철저하게 ‘화장법 도감’ 혹은 ‘화장법 유형학’의 형식으로 작업을 전개하였다. 결과적으로 일정한 조명과 화각 그리고 균일한 사진적 재현을 통해서 보여 진다. 이는 한국의 십대 소녀들이 그들의 소녀성을 연예인의 모습을 통해 롤 모델화하고 롤 플레이할만큼 유형화되고 공식화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초상사진에 있어서 유형학은 아주 부도덕하고 잔인한 분야이다.

+화장의 전면前面

“정면성正面性이 물리적인 방향성이라면 전면성前面性은 심리적인 형상성이며, 정면성이 모델과 카메라의 관계라면 전면성은 모델과 관객과의 관계이다.”

진동선,<한 장의 사진 미학>, 사진예술사,(2001)

십대들의 화장은 그들이 꿈꾸는 여성성의 욕망을 드러내는 행위이고 동시에 정체성의 불안감을 감추는 방어 수단이다. 나는 사실 화장이 마스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화장소녀化粧少女>는 소녀들의 화장의 전면Facade을 다루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화장은 실제를 가리기 위한 행위Mask라기보다는 내밀고 싶은 얼굴Facade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연예인들의 얼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한 소녀들은 자신들의 초상을 보여 줌에 있어 어떠한 전면을 내세워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실제적인 자아를 드러내는 정면성과는 거리가 멀다. 때문에 위에서 인용 된, 사진 평론가 진동선씨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의 화장의 전면성은 그들을 바라보는 연예 미디어의 욕망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들의 불안한 정체성이 정면보다 오히려 전면前面으로 만들어지는 화장법에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정체성은 내면이 아니라 전면에 있다. 결국 우리가 아는 소녀는 전면Facade일 뿐이고 이미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