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파사드 주체들

강수미

 

만약 어떤 사진가가 동시대의 특수성을 명료하고 즉물적으로 자신의 사진 속에 현상해내려 한다면, 어떤 대상에 포커스를 맞출까? 가령 그 시대적 성격이 ‘내면성의 부재’라거나 ‘감출 수 없는 불안’처럼, 상당히 주관적이고 추상적이며 정서적인 것이라면? 이 경우 사회학은 반인륜적 범죄 발생률이나 자살률과 같이 숫자로 환원된 통계지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정신의학은 우울증, 강박증, 정신분열증 같은 병리적 징후와 현상을 논증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진으로는 그 주관적, 추상적, 정서적인 것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 퍼뜩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초고층 빌딩 숲의 네온사인으로 휘황한 대도시 밤거리를 찍은 사진이, 상품 물신과 자본 만능주의에 빠진 지금 여기 삶의 빈곤한 내면을 상징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흔들리는 포커스, 변칙적인 프레이밍, 극단적인 조명과 색조를 통해 동시대 삶의 저 아래 잠복해있는 불안 심리를 은유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서두에 물은 것은, 사진이 어떤 수사학적 방법도 동원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내면 없음’과 ‘드러난 불안’을 가시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찍겠냐는 것이었다. 사진의 어떤 상투성, 바르트R.Barthes의 용어를 빌리자면 ‘스투디움studium’도 비껴가면서 그것을 드러내겠느냐는 것이다. 싱겁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 답이 사진의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가장 상투화된 피사체 중 하나인 ‘동시대인의 얼굴’이라 본다.

 

초상사진 속 표면파사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진작가 오형근은 한국의 ‘아줌마’를 찍었고, ‘소녀’를 찍었다. 물론 그보다 먼저 미국에서 ‘미국인’을 찍었고, 이태원 거리에서 ‘배우’ 또는 ‘행인’을 찍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여러 갈래의 논의들, 예컨대 한편으로 이 작가의 작품 이력을, 다른 한편으로 그 사진들의 미학적 성취라든가 인류학적 의의라든가 사회문화적 의식 같은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형근의 일련의 사진에서 ‘지표성 indexicality’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논할 이 작가의 사진(책에서는 화장 소녀들의 불안한 전면에 주력한다…)에 있어서, 작가의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 이미지가 되는 결정적 스위치이자, 그 사진의 숨은 의미를 밝히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어쩐지 마릴린 몬로를 연상시키는 루이지애나의 백인 여성, 번들거리는 화장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한국의 아줌마 또는 긴 생머리에 새치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학생, 뭔가 과장된 포즈를 취한 이태원의 트위스트 김, 이들은 모두 실존인물이자 오형근의 사진 속에서 특정 유형의 정체성을 지시하는 지표적 이미지이다. 기호학자 퍼스C. Peirce에 따르면, 지표는 “만일 그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기호로 만드는 특성을 즉시 상실하는” 기호이다. 요컨대 벽의 총알자국, 주민등록증의 지문처럼, 지시대상과 물질적으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기호적 의미가 확립되는 기호가 바로 지표인 것이다. 오형근의 사진 속 초상肖像은 그 인물의 물질적-신체적 현존에 의해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지표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진은 지표 이미지이다.) 그런데 앞서 내가 말한 오형근 사진의 지표성은 여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 그 사진의 인물들이, 각각 자신이 속해있는 물리적, 심리적, 정서적, 제도적, 세대적, 관습적 속성 따위를 실존의 지표로서 현상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현상된 이미지가 때로는 ‘할리우드영화 속 여성 스테레오타입을 자기화한 미국 북서부 여성’이라는, 때로는 ‘뻔뻔하고 무신경하고 그악스러운 여자들의 대명사가 된 한국 아줌마’라는 기호적 의미를 확립한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그 의미가 거기 그러한 인물들의 ‘있음’을 개념 언어로 환원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정체’를 통계수치로 샘플링한 것도 아닌, 대상의 있음과 그러저러하게 드러난 상태를 빛으로 떠낸 과정 속에서 형성됐다는 데 있다.

오형근은 지금 여기의 사람들, 즉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내면성이 없이 전면前面으로만 이뤄진 주체로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주체의 얼굴들 — 이를테면 아줌마든 여학생이든 소녀든 한물간 배우든 아저씨든 게이 청년이든 — 에서 일관되게 ‘불안’을 감지한 것 같다. 그가 반복해서 인간의 얼굴을 ‘건물의 정면’을 지칭하는 건축 용어인 ‘파사드facade, 前面’로 정의하는 것을 고려하면, 또한 그 초상사진이 집요할 정도로 엄격하게 피사체로부터 ‘표정 없는 얼굴’을 끌어낸 결과임을 생각할 때, 작가의 이러한 관점과 판단은 매우 확고부동해 보인다. 그런데 전면은 후면과 짝이고, 내면은 외부와 짝이다. 이 양자들의 관계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전면과 후면이 한 장의 종잇장처럼 표면들의 구조라면, 외부와 내면은 3차원의 부피를 가진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형근이 ‘파사드’ 라는 말로 의도하고자 했던 바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을 내 식대로 풀어보면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표면들로만 이뤄진 파사드적 주체들(surface-facade subjects)’이라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내면 없음이 표면에 있음’이라는, 작가의 직관이 파악한 변증법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직관으로부터 우리는 ‘내면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안한 것’이라는 이해뿐만 아니라, ‘내면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심리가 어딘가 잠복될 곳을 찾지 못하고 얼굴이라는 표면에 드러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지금 여기의 얼굴-전면’은 동시대가 갖고 있지 않은 내면의 부재증명alibi이자, 불안 심리의 죽은 얼굴death mask이다. 달리 말해 내면성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여기 ‘있는’ 얼굴이고, 불안한 심리가 가시적 기표로서(더 이상 생생한 기의일 수 없는) 떠오르는 곳 또한 얼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오형근의 사진에서 우리가 ‘지표성’에 주목해야 했던 이유다.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적 증거.

 

화장의 민낯, 불안의 가면

 

오형근은 지난 2008년  국제갤러리에서 <소녀들의 화장법>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는 동대문 쇼핑몰이나 여대 앞처럼 여학생, 여자애, 소녀들이 모이고 흘러 다니는 길거리에서 캐스팅한 십대 후반 여자들을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구성됐다. 이전의 소녀 사진(2004년  일민미술관 <소녀연기少女演技>전시작)과 이 전시작들이 변별되는 지점은 전시 타이틀에서 드러나듯이, ‘화장’이다. 말하자면 소녀는 소녀이되, 2008년 전시작에서는 작가가 그녀들의 얼굴에 ‘덧씌워진 화장’에 주목했다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사진 속에서 소녀들은 거의 모두가 얼굴에 뽀얀 분을 바르고, 눈가엔 아이라인을 그리고, 속눈썹에는 마스카라를 했으며, 입술에는 옅게 반짝이는 분홍색 립글로스를 발랐다. 심지어 어떤 소녀는 서클렌즈를 껴서, 이를테면 눈동자에도 화장을 한 모습이다. 아직 앳된 어떤 아이의 얼굴에서는 화장이 들떠서 마치 엷게 밀가루가 날린 것처럼 보이고, 또 다른 소녀는 원래 있던 눈썹을 밀어버리고 초승달 같은 가는 눈썹을 그려 넣어 얼굴 자체가 한 장의 드로잉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런 경우 쉽게, 오형근 사진 속 소녀들이 자신의 본래 얼굴이 아니라 만들어진 얼굴, 즉 가면을 썼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물론 그녀들의 민낯이야말로 그녀들이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또는 타고나서 그 나이에 이를 때까지 자연적으로 혹은 인공적으로 변화한 얼굴이다. 그러니 그 위에 인위적으로 화장을 덧그린 얼굴은 가면이라 해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화장은 어디서 온 것인가? 눈을 찌를 듯이 날카롭게 말아 올린 속눈썹 스타일은 어디서 왔으며, 하필이면 핑크색으로 물들인 입술 화장법,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며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긴 웨이브 머리 형은 어디서 왔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게 말해도 그 소녀가 ‘그렇게 하고 싶고, 그렇게 보이고 싶다’는 그녀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닌가? 좀 더 순진한 소녀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러면서도 좀 더 섹시한 매력을 풍기고 싶어서, 소녀는 자신의 얼굴에 화장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좀 전에 쉽게 내린 해석을 수정 해야 한다. 즉 화장한 얼굴은 원래의 얼굴을 가린 가면이 아니라, 그 소녀의 욕망을 드러낸 진짜 얼굴이라고. 화장한 얼굴이야말로 소녀의 저 어딘가 있는 욕망을 곧이곧대로 노출시킨 민낯이라고.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형근은 화장한 얼굴들에서 하나 같이 ‘불안’을 읽는다. 비단 소녀들뿐만 아니라 이 작가는 이제까지 자신이 찍었던 길거리의 아줌마, 광주 도청의 아저씨, 이태원 뒷골목의 옛 배우, 게이, 여학생, 여자아이 등등, 모든 인물들의 얼굴에서 불안을 발견했다고 한다. 작가에 따르면, “미열 같은 불안”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제각각 얼굴에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미세한 강도로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주장은 누군가에게 상투적이고, 주관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꼭 사회학자나 정신과 의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스스로 ‘지금 여기의 삶이 불안하고, 나의 심리상태가 불안정하다’고 매일같이 되뇌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불안하고 불안정한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작가가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사진이 그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아니, 보여준다. 장르상 초상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오형근의 사진들에서 우리는 피사체가 된 바로 그 인간의 개인성을 감지할 수가 없다. 모델이 된 인물의 숫자만큼, 그 사진들에는 다양한 인성이, 일반화할 수 없는 개별성이 현상되어야 마땅할 텐데, 사진 속 인물들은 비슷비슷한 스타일과 천편일률적인 화장과 무색무취의 분위기로 인화지 표면에 ‘후면 또는 이면裏面 없는 파사드’처럼 붙박여 있다. 그 사라진 개성, 부재하는 면들, 분위기 없는 분위기가 바로 오형근이 본 우리시대, 우리 자신의 ‘불안’이다.

 

타자의 욕망과 숨은 의미

 

이를 오형근 사진의 한 시각적 요소를 가지고 말해보자. 내가 보기에 그 사진에서 가장 기이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곳은, 인물들의 머리카락과 얼굴이 맞닿은 부분에서 빚어지는 불규칙한 윤곽선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단호한 윤곽선 때문에 마치 종잇장에서 오려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희뿌옇거나 희멀건 얼굴이다. 그 윤곽선은 모델이 화장을 짙게 했건 옅게 했건, 혹은 아예 하지 않았건 얼굴을 ‘가면’처럼 보이게 한다. 단순히 무표정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그 오린 가면 같은 얼굴을 모델의 몸에서 떼어 내어 다른 인물의 얼굴과 바꿔 치기 해보라. 그렇게 해도 사진은 이전의 얼굴이 있었을 때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한 개인의 대표적 이미지이기 때문에, 사진의 나머지 부분이 거기에 압도되어 비슷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여러 사진 속의 각자가 거의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치환해도 사진들 간에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앞서 우리가 화장한 얼굴이야말로 ‘민낯’이라 했을 때, 그 의미는 피사체가 된 인물의 욕망이 화장이라는 형태로 —  즉 징후적으로 —  드러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드러남’이 요컨대 불안의 요인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감추고 싶은데, 숨길 내면이 없고, 그러다 보니 얼굴에 고스란히 욕망의 감정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표출된 정서상태가 불안인 것이다. 게다가 그 욕망이라는 것이 자기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데 더 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진에서 얼굴만을 오려 이 사진에서 저 사진으로 치환시켜보자는 앞선 내 제안이 의도했던 것은, 그렇게 해도 별 차이가 없을 만큼 개인의 ‘유보할 수 없고 환원 불가능한’ 개인성이 희박해졌음을 실감해보는 데 있다. 소녀들의 화장법은 소녀 각자의 성향보다는 유명 여자 연예인의 이미지를 닮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발원하고, 또래 집단에서 소비되는 대중문화 기호를 반복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한 그 어떤 모호하고 덧없는 자기애로부터 발생한다. 이 욕망 혹은 자기애는 ‘타자의 욕망’(J. Lacan)이다. 나의 주체성에 의해 추동 된 것이 아닌 욕망, 내가 그 욕망을 일시적으로 실현했다 하더라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인 것이다. 그래서 소녀가, 우리가 불안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형근이 지표화한 동시대인들의 얼굴, 그 얼굴들에 일관된 정서인 ‘불안’이라는 가면의 힘이다. 그의 사진은 가면을 벗겨내면 진짜 얼굴이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관성적 믿음을 깨고, 그 가면의 배후에, 이면에, 깊은 곳에 아무 것도 없음을 시각적으로 조명한다. 다만 파사드에는 불안만이 감돌 뿐이다. 이것이 오형근이 찍은 인물 사진들의 ‘숨은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