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도 아이도 아닌… 소녀, 넌 누구냐 – 강수미
사진의 눈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초상을 문화적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려온 작가가 있다. 31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소녀들의 화장법》전(展)을 열고 있는 오형근(45)씨가 그렇다.
그의 90년대 대표작인 《아줌마》 연작은 한국사회의 익명적 존재, 즉 밥 짓고 애나 잘 키우면 그만이라고 뭉뚱그려온 여자들의 개성과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 사실성이 예술사진의 예술적이지 않은 모델을 넘어, 대중 매체의 결정적 캐릭터로서 아줌마를 조명하도록 자극했다.
이 사진가의 눈은 2000년대 들어 ‘소녀’로 초점 이동한다. 2004년 일민미술관에서 선보인 《소녀연기(演技)》가 오형근씨의 ‘소녀 탐구’ 서론에 속한다면, 이번 전시는 그 탐구의 세부(細部)라 할 만하다. 전자가 소위 ‘소녀스러움’을 연기하는 10대 연기자 지망생들을 피사체 삼아 정형화된 소녀 이미지를 포착했다면, 후자는 현실의 화장한 소녀들을 통해 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호한 위치에 있는 그녀들의 미적 취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씨는 소녀들의 초상을 위압감이 들 정도로 확대 인화했다. 한결같이 컬러 렌즈를 낀 눈동자, 미장원에서 갓 다듬은 듯한 갈색 머릿결은 지금 대한민국 소녀들이 뒤집어쓴 가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또는 각자 다른 이름의 소녀들이 거의 똑같이 외모를 꾸미는 현실의 지표이다.
‘유형학적 사진’이라는 것이 있다. 특정하게 분류 가능한 대상을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는 다수(多數)로, 실증적으로 찍는 사진이다. 냉혹한 얼굴의 공증인부터 비대한 몸매의 요리사까지, 20세기 초 독일인의 얼굴을 기록한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의 작품이 선구적이다. 그런데 오씨의 소녀 사진은 일견 유형학적으로 보여도, 엄격히 따지면 그렇지 않다.
작가는 길거리에서 마주친 소녀들을 스튜디오로 불러들여서 대형 컬러 슬라이드 앞에 앉히고, 일률적인 포즈와 표정으로 촬영했다. 소녀들이 유행하는 화장과 헤어스타일에 갇혀 있다면, 오씨의 사진은 다시 한 번 그녀들을 정면 응시, 무표정, 사각 구도 속에 가뒀다.
어쩌면 관람객들은 이 소녀들이 속해 있는 진짜 유형의 세계를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견할 것이다. 잘 다듬은 상반신에 견주면 터무니없이 무신경해 보이는 만화그림 양말이나 무릎의 멍. 이것들은 그 소녀의 집, 동네, 학교가 어떨지 상상케 한다. 누군가에게는 작가의 시선과는 별개로 우리 삶을 비추는 곳이 거기이다.
강수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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