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오 형 근 _ 그는 늘 불안을 찍었다

김 남 인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앞으로 불안을 찍으려고 해요.”
사진작가 오형근의 스튜디오에서였다. 작가에게서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불안을 찍지 않으셨나요?”
– 작가는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조심스럽게 슬쩍 미소 짓다가 대답했다. 맞아요.

사진작가 오형근이 지금까지 줄곧 찍어 온 것이 바로 ‘불안’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 《소녀연기》(2004), 《소녀들의 화장법》(2008)에서도 ‘소녀’만을 보았다.[도1,2,3,4] 그러나 그것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에서 기인한 바 크다. 욕망이 앞서면 이미지 표면의 자극적인 의미망에 갇히기 쉽다. 우리가 소녀를 대상화 할 때 -흔히 우리 사회에서 그러하듯이- 우리는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는 소녀를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길 위에서, 지하철에서, 어린 여학생의 육체를 무관심한 척하며 훔쳐보듯 그의 작품을 본다. 그리고 바로 이 때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지 못하는 힘겨운 순간이다. 기존의 관념이란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애써 넘어서고자 할 때에만 비로소 넘어서진다. 너무도 당연한 듯, 진실인 듯 존재하는 그와 같은 관념들은 우리가 그것을 문제라고 인식하기조차 힘겹게 만든다. 마치 뻔뻔한 얼굴의 미인처럼.

그러나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매우 매력적이다. 애초 사진은 ‘사실의 증명’을 위한 것이었다. 사진은 ‘몇 초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그것이 없어졌다’와 같은 주장의 증빙자료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극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사진들도 실제로는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다. 결국 사진은 가장 태연하게 거짓말할 수 있는 예술인지 모른다. 그것은 이미지의 표면을 넘어서길 요구한다. 사진은 새롭게 세상을 보고자하며, 어떠한 방식이건 세상을 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개별적 시선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자 무기, 동시에 약점은 세상으로부터 직접 베어 온 이미지, 현실의 직접적인 차용을 통한다는 것이다.

오형근의 프레임 속 인물들을 떠올려 본다. 작가는 그가 발견한 인물들의 군상을 개별 인물을 통해 접근한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의 인물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하나의 추상화된 이미지로 맺힌다. 이것은 독일의 유형학적 사진들, 비슷한 시각적 형식을 가진 이미지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오형근의 사진에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성격이 감지된다. 오형근은 개별 이미지들을 모아 하나의 추상화된 일군의 이미지를 만들지만, 개별 이미지에 대해 섬세한 정서적 반응을 보여준다. ‘불안’을 찍는다는 작가의 태도는 이 때 더욱 중요해진다. 그는 하나의 그룹을 이루면서도 동시에 개별 이미지로부터 느껴진 정서, 어쩔 수 없이 개인이 올곧이 견뎌낼 수밖에 없는 불안의 정서를 포착해 낸다. 이 때 사진가는 분석자로서 프레임의 밖에 ‘남’으로 자리하지도 않으며, 이미지의 ‘지배자’로 자리하지도 않는다. 유형학적인 접근은 사실 이미지에 대한 장악의 욕구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오형근의 사진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고 있다보면 인물 군을 탐색하는 사진가로서 개별 이미지를 모아가고자 하는 욕구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유형을 찾아 정체성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애쓰는 이들에 대한 강력한 정서적 교감을 감지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성격은 그의 첫 번째 시리즈 작품 《미국인 그들》에서도 볼 수 있다.[도5,6] 작가가 사진을 처음 만나 공부했던 미국, 이 미국을 여행하며 포착한 이 생경한 얼굴들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부유하는 시선을 담고 있다. 《아줌마》는 또 어떠한가. 도무지 유행이나 패션과는 거리가 먼 듯하면서도 대담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한 목걸이, 절박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그은 입술의 짙은 선의 아줌마들은 당당하면서도 위태롭다.[도7,8] 《소녀연기》의 소녀들이 보여주는 당돌한 자기표현과 알 수 없이 감도는 불안감, 《소녀들의 화장법》에 보이는 절묘한 자기표현의 기술과 불안에의 감춤의 긴장. 이들 모두에게서 작가가 포착한 것은 바로 불안이다. 무엇인가 어디에도 자신의 존재를 기댈 곳 없는 사람들. 끊임없이 부유하며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밖에 돌아올 곳이 없을 듯한 이들에게는 사실 우리 모두가 감추면서 살아가는 정서가 저 깊은 바닥에 깔려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사진의 프레임을 벗어나면 혼자만의 방 안에서 이렇게 중얼거릴 것만 같다. “아무래도 나는 이 곳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아.”

한편 불안만큼 불안한 것도 없다. 불안은 결국 순간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작가 역시 말했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들 대부분이 자신의 정면(파사드, facade)을 내면화하고 결국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불안이란 어느 한 순간의 상태에 가까우며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에 지극히 충실한 정서라는 사실 자체가 불안의 불안을 더욱 증폭시킨다. 작가의 사진이 보여주는 불안의 정서는 사진기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조각, 흐르는 시간을 잘라내고 도려내는 시간의 순간 속에서 가장 극대화되고 증폭 되며 밀도 높은 상태로 드러날 수 있다.
이와 같은 불안의 순간에 대한 감지 능력은 결코 간단하거나 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다시 한 번 그가 늘 불안을 찍어왔다는 것, 작가가 끊임없이 불안이라는 이 불안하고 파악하기 힘들며 손에 쥐기 어려운, 순간의 정서를 붙들려 했다는 점이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낯선 이의 사진이라 할지라도 쉽게 찢어버리지 못한다. 그만큼 인물사진은 작가로서 보는 이와 보이는 이 사이에 형성되는 심리적 관계와 긴장을 끊임없이 견제해야 하는 장르이다. 오형근은 약 20년간 인물을, 불안을 찍어 왔다. 그의 사진은 점점 더 은밀하고 섬세해지는 불안의 결 속에서 서로 다르면서도 같으며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리고 무언가 분명히 다른듯한데 같아 보이고, 같은듯한데 달라 보이는 이와 같은 존재의 상태는 도무지 나 스스로조차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면을 감추려 하는 얼굴이 뿜어내는 불안의 감정을 극도의 순간으로 끌어올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