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연기
김희령/일민미술관 디렉터
사진작가 오형근에게 ‘아줌마’*는 넘어서야 할 콤플렉스일까, 아니면 든든한 백그라운드일까. 오형근은 ‘아줌마’ 사진작업으로 당시 사회적 신드롬을 재확인했고, 또한 이로 인해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게 됐지만 정작 그는 아줌마가 싫다고 말한다. 그가 싫다고 말하는 아줌마 이미지는 무엇일까. 또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사진작가 오형근이 이번에는 여고생을 찍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여고생 이미지를 드러내고, 그 밑에 담겨진 은밀한 시선을 이야기하고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들춰진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작가 자신도 있음을 오형근은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고생 작업은 또 다른 신드롬을 위한 전략일까. 아니면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의 발현일까. 그렇다면 작가로 하여금 여고생 작업을 가능케 한 우리 시대의 모습은 무엇인가.
오형근 사진작업의 절반은 영화**에 관련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그가 영화적 시선을 잘 잡아내는 능력을 영화인들에게서 인정받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그의 사진에 영화적 요소가 담겨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무엇이 먼저이던 간에 오형근은 예의 사진작가들과 다른 색채를 지닌 작가다.
그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찍은, 거리에서 어울리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담은 ‘Americans Them’이나 영화 촬영현장의 시민 연기자들과 군중을 기록한 ‘광주 이야기(Kwangju Story)’는 작가가 비록 사진의 기본 전제인 스트릿 포토그래퍼(street photographer)로서의 사진을 추구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진작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미묘한 연출력이 엿보이고, 여기에는 인물의 내러티브가 담겨져 있다.
그의 인물사진을 보노라면 인물을 둘러싼 배경에 눈길이 간다. 작가는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 또는 공간의 비중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이러한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감상자는 배경을 주시하게 되고 사진 속 인물에 대해 관객 고유의 상상을 하게 된다. ‘뉴 올리언스, 루이지아나’, ‘김불이, 배우, 이태원 선녀암 골목에서’, ‘진주 목걸이를 한 아줌마’ 등 작품 제목에서 거명하는 인물이 있는 장소, 인물의 직업 또는 착용한 액세서리는 감상자에게 좀더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하면서 종합적인 사고를 지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가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이러한 특징은 오형근이 사진이 아닌 영화라는 교육적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오형근은 대상을 다룸에 있어서 영화적이고 종합적인 연출을 시도한다고 할 수 있다.
오형근의 작업에 나오는 여고생들은 카메라의 렌즈에 자유자재로 반응하는 세대다. 카메라를 다루는 사람에 의해 그들의 이미지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피사체가 렌즈를 다룬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녀들의 연출력은 뛰어나다. 그들이 초등학교 시절에 붐이 일었던 스티커사진 제조기는 이러한 능력표출의 첫 단계였다. 이들은 2-3명이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조그만 사각 칸막이 안에 갖은 표정의 연출을 되풀이해가며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물결과 소형 카메라가 부착된 핸드폰의 대중화는 이들의 연출력을 한 단계 성숙시킨다. 이들은 굳이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이 쉬는 시간 교실에서, 방과후 패스트푸드점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들의 연기를 즉각 담을 수 있는 렌즈를 가지게 됐다.
때마침 TV 스크린에서 접하게 된, 미지의 세계에서 막 도착한 듯한 신비롭고 묘한 이미지가 담긴 광고는 소녀들의 연출력을 더욱 부채질하고 그녀들은 매혹적인 이미지 생산에 더욱 고심한다. 이들은 드러나지 않은 권력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내놓는 소녀 이미지를 보며 아름다움은 어리고 섹시하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이 세뇌된 미의식을 마치 자신들의 고유판단이라고 착각한다.
일민미술관이 마련하는 오형근의 <소녀연기>작업은 이제까지 보여줬던 작가의 연출력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기존의 작업들이 무의식적 연출이었다면 이번의 여고생 작업은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작가는 사진 상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무대를 만들기도 하고 장치를 사용하기도 함으로써 여고생 이미지를 형상화하고자 한다. 작가에게 여고생이 지니고 있는 실제 이미지의 진정성에 대한 고민은 무의미하다. 작가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표피적 상징으로서의 여고생 즉 소녀 이미지를 마치 채집하듯 잡아내고, 이것을 펼쳐 보이고 있다.
사진가가 갖기 마련인 허구와 실제 사이의 갈등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소녀연기>연작은 이 두 요소를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사진의 방법론적인 고민을 넘어, 그의 작업을 자신이 구성원으로 속해있는 사회의 한 현상을 읽어내는 도구로써 그 가치를 살려내고 있다.
교복을 착용한 소녀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익혀왔던 표현능력을 맘껏 발휘한다. 학생 신분의 표식인 교복이 그 일차적 기능에 앞서 권력집단의 취향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렌즈를 향해 정면대응의 소녀연기를 펼친다. 순수하고 풋풋한 향기가 더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을 새도 없이 그녀들은 사회가 쳐놓은 미적 욕망의 그물망에 걸려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무모하다. 오히려 반복하여 정렬된 여고생 연작에서 우리는 단정할 수 없는 미지의 아우라를 깨닫게 된다. 오형근은 자신이 지닌 영화적이고 대중문화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사회의 한 단면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현실을 확인하고 있다.
* 오형근은 1999년 <아줌마>라는 타이들의 개인전을 가졌다. 당시는 사진에 대해 일반인의 관심이 증폭된 시기였는데, ‘아줌마’라는 흔치않은 주제가 주는 강렬함으로 주목받았다.
** 오형근은 ‘꽃잎’, ‘공동경비구역 JSA’,’‘스캔들’, 그리고 ‘장화홍련’, ‘태극기 휘날리며’ 등 30여 편의 영화 포스터 작업을 했으며, 패션과 광고분야 사진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 오형근은 미국 Brooks Institute of Photography를 마치고, 오하이오대학 예술대학원에서 순수사진과 영화를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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