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근-불안한 초상

박영택

 

오형근이 찍은 사람들의 얼굴은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어색하다고나 할까, 괴이하다고나 할까 혹은 심란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들 얼굴 자체가 불안한 것인지 그 얼굴을 보는 나의 마음이 불안한 것인지는 잘 구분이 가지는 않는다. 오형근은 누군가의 불안한 얼굴을 찍는다고 말한다.

“태생적으로 나는 타인의 불안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그는 결국 인간의 얼굴에서 불안의 낌새를 잡아챈다. 불안이란 명료한 시각적 대상은 아니기에 결국 불안해 보이는 기미, 표정, 몸짓 등에서 찾아진다. 불안은 흔히 초조라고도 한다. 뚜렷한 원인이 없이 근심, 걱정, 두려움 등을 느끼는 것을 일컫는 이 감정은 분명하고도 실재적인 위험에 대한 반응으로 인해 생기는 공포와는 구별된다. 그러니까 원인을 알 수 없는 내면의 주관적인 감정 충돌의 산물이 불안이다. 까닭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당혹스럽고, 분명 심리적 · 정신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부정하기 어렵다. 프로이트는 불안이란 지니고 살기에는 너무나 위협적이고 괴로운 자신의 경험 · 감정 · 충동 등을 억압한 결과로 내면의 감정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람이 불안해지는 것은, 또는 이지러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외부에서 무언가가 ‘나를 찌를 때’다. 그것은 결국 시선이다. 여기서 외부란 타인들의 세계이고 어떤 말, 어떤 시선, 어떤 행위들이다.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불안해진다. 아울러 그가 겪어낸 삶의 상처들, 현실적 삶에서 연유하는 온갖 근심이 착잡하게 고여 있어서 그것이 쉬이 잊히지 않고 지속적으로 현재의 시간 위로 수시로 출몰하기에 불안하다. 지난, 죽은 시간이 현재를 대신해서 살기에 그렇다. 

 

오형근은 사람의 얼굴이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여긴다. 초상은 흡사 지도가 되어 독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텍스트로서의 얼굴이다. 얼굴은 책이다. 그가 살아온 삶의 이력과 상처들로 울울한 숲이다. 따라서 얼굴은 속일 수 없다. 그것은 문자로 쓰일 수 없는, 쓰이지 않는 역사책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읽는다’, ‘본다’는 표현은 어딘지 부족하다. 얼굴은 읽어야 하는 텍스트다. 얼굴을 이루는 조밀한 부위와 자취들은 수없이 많은 단어들로 기술된 문장과 문장이다. 그러나 그 문장은 쉽게 독해되지 않는다. 특정한 문법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거나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규칙 없는 문장이 얼굴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이라는 책을 쓰는 일이다. 얼굴로 산다는 것이다. 얼굴은 살아온 내력이자 사연이고 그대로 추억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을 때 보여주는 마지막 얼굴은 그간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부호다. 현재까지 살아온 모든 것의 총화이기도 하다.

오형근은 누군가의 얼굴/책을 읽는다. 그러고는 막연한 상상력에 빠져든다. 그러면 비교적 선명하게 그 얼굴을 지닌 이의 전력이나 사연이 불가피하게, 불현듯 얼굴에 각인되어 떠오른다고 한다. 그는 그것과 접촉하는 자신을 느낀다. 그리고 그 얼굴을 사진으로 찍는다. 불안이 스멀거리는 얼굴, 안개처럼 퍼지는 얼굴, 까닭 모를 서글픔이 기포처럼 떠오르는 그런 얼굴, 다시 말해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얼굴들이 어둠 속에서 낯설게 다가온다. 

 

그는 지난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땅의 여자와 남자를 찍었고, 아줌마와 아저씨와 여학생을 찍었다. 한결같이 그들 얼굴에 서려 있는 불안감을 초상화한 작업이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오형근이 상상한 불안에 가깝다고 말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누군가의 얼굴에서 불안을 읽는다. 그리고 그 불안한 얼굴을 수집한다. 따라서 불안하다고 여겨지는 얼굴의 주인공이 실제로 불안한 상태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찍힌 사진으로 봐서는 어딘지 좀 불안해 보이거나 낯설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오형근은 자신의 불안을 타자의 초상에서, 얼굴에서 읽는 것은 아닐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막연한 불안감이란 특정 개인의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공유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라는 공통된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불안의 정체도 나름의 유사성을 지닐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나른한 봄날에 겪는 미열처럼, 하루 종일 성가시고 신경 쓰이는 일상적인 불안감을 담아내려고 했다.”

그는 특히 화장 짙은 아줌마의 번들거리는 얼굴과 공들여 화장한 소녀의 구겨진 바지에서 불안을 느낀다. 그것을 보는 자신이 불안한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불안한 여자들을,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불안을 촬영해온 셈이다. 

 

1997년 ‘아줌마’ 시리즈는 주관적인 시선이 개입해서 이른바 아줌마의 유형을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줌마란 일정한 틀 속에서 재현된다. 그는 아줌마의 전형성을 잘 보여주는 아줌마, 롤 모델로서의 아줌마를 찾았다. 그렇게 해서 주변에서 섭외를 했고 엑스트라 조합에서 모델을 섭외했다. 아줌마들은 한껏 멋을 낸 성장 차림으로,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공들인 화장과 패션으로 치장을 하고 나왔다. 그것은 집에서, 동네에서 일상적으로 입는 옷과는 차별이 되는 지점이자 자신의 여성성을 표상하는 기호를 착용한 결과다.

그는 그렇게 공들여 치장을 하고, 화장을 하고 나온 아줌마들의 패션과 화장을 들여다본다. 관찰한다. 순간 추리가 작동되고 여러 상상력이 움직인다. 아줌마들이 공들여 멋을 부리고, 정숙한 중년 여성이나 자기 또래의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몸가짐 또는 패션이라고 여긴 정형화된 어떤 룰에 입각해 연출한 흔적들을 본다. 그들은 거의 비슷한 옷들, 이른바 유니폼화된 옷을 걸친다. 왜 여자들은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한 사회에서 그 나이 또래가 마땅히 입어야 한다고 여기는 그 유형화된 옷들을 죄다 걸쳐 입으면서 불안한 정체성을 두르고자 할까? 다소 낡거나 솔기가 흐려진, 혹은 보풀이 죄다 일어난 옷의 표면, 그 안에 받쳐 입은 반짝이 블라우스 그리고 과도한 화장으로 인해 드러난 자국은 무척 슬퍼 보인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는 땀구멍과 번들거리는 개기름, 얼굴에 흐르는 진땀, 그리고 옷감이 자아내는 묘한 질감은 플래시를 통해 더욱 번득이며 발광한다. 검은 배경과 흑백사진은 이 아줌마의 현실적 삶의 공간을 늪처럼 뒤로 물리고, 가라앉히고 오로지 화장으로 인해 번들거리는 얼굴과 광채, 이상한 표정과 어딘지 슬퍼 보이는 야릇한 얼굴의 내부만을 목도하게 한다. 이들 아줌마들의 개별적인 개인성은 사라지고 그저 아줌마의 전형성만이 슬픈 기호로 젖은 종이처럼 달라붙어 있다. 아주 위태롭고 고독하게 말이다. 아줌마들은 스스로를 다른 이들과 구별해주는 이른바 ‘재현의 전략(재현의 정치학)’을 쓰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오형근의 사진은 그런 아줌마들의 정체성의 전략이 어떻게 외모로 나타나는가를 세심하게 보여준다. 얼굴과 옷, 화장과 액세서리 등의 세부적인 요소에서 빛을 발하며 발설한다. 그의 사진이 보여주는 모든 디테일, 즉 옷, 장신구, 화장, 머리 모양, 표정 그리고 그 질감과 반짝임 등은 아줌마들이 스스로를 재현하는 전략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그의 사진은 결국 질감과 톤, 컬러를 통해 내러티브를 지닌다. 디테일이 말한다. 그 디테일이 이 슬픈, 불안한 아줌마의 얼굴과 내면세계를 느닷없이 발화한다. 아줌마들 스스로가 아줌마의 정체성이나 여성스러움이라는 것을 자신의 몸에 덧씌우고 있는 그 행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사진은 그 얇고 깊이 없는 정체성의 허망함과 날림의 것들이 자아내는 불안의 경련을 조심스레 떠낸다. 

 

아줌마의 몸을 보던 오형근은 시선을 이내 소녀들로 옮긴다. 교복을 입은 소녀들과 화장한 소녀들, 십대 소녀들이 그들이다. 소녀들 역시 아줌마와 동일하게 특정한 기호들을, 불안한 정체성의 기호들을 획일적으로 두르고 있다. 그들 역시 남성의 시선이 낳은, 우리 사회가 잉태한 여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기호다. 모든 인간은 십대를 거치면서 독립된 개인이나 사회인으로 성장한다. 미성숙기이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시기가 그때이다. 한국의 국가, 사회, 가정은 오늘날 청소년들에게는 단 하나의 가치관만을 다소 폭력적으로 제시한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사회적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개인의 경쟁력과 성취력을 높이기 위해 살아야만 하는 가치관이 그것이다. 그 외에 삶의 다른 가능성과 의미는 물을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오형근이 모델로 섭외한 소녀들 역시 경쟁 구조 속에서 타들어가는 아이들이다. 그와 동시에 여자로서 성적 정체성을 주변 남자들로부터, 사회로부터 강제당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우선 오형근은 연기 학원에 다니며 공식적으로 소녀 연기를 배우는 소녀들을 모델로 삼았다. 소녀다움을 가장 잘 연기하는 이들이기에 그럴 것이다. 물론 그런 학원에 나가면서 연예인이나 모델을 꿈꾸는 아이들 외에도 일반적인 청소년들, 십대 여학생들 또한 대부분 유사한 패션과 화장, 몸짓과 말투 등을 통해 자신들의 여성적 정체성을 연출한다. 연기한다. 그런데

그 연출은 획일적·집단적으로 강제되고, 특정 시선을 의식하면서 내재화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의 진정한 개인성을 사라지고 소멸된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10대 소녀들은 거푸집에서 찍혀 나온 거대한 집단과도 같다. 똑같은 머리 스타일, 눈 화장, 짧은 치마, 동일하게 착용하는 운동화와 양말, 가방 그리고 춤과 노래, 욕과 똑같은 관심사를 완벽하게 공유하는 기계와 같은 몸들이다. 대중문화와 연예인에 의해 배양된 숙주들이다. 연기 학원에 다니는 여학생들이야말로 소녀 연기를 노골적으로 배우는 아이들이다. 이 여고생들은 대중 소비 사회에서 스타로 성공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틀 안에, 특정 시선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남자 감독 내지 연출 프로듀서에게 소녀 연기를 배운다. 남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여자의 역할, 소녀상을 거듭 연기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들, 오빠들이 원하는 이상적이고 유혹적인 소녀상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그것이 소녀상이고 자신들의 정체성이라고 믿는다.

 

오형근은 교복을 단정하게 받쳐 입은 여고생의 전신을 찍었다. 관찰자들은 이 유니폼/교복 입은 몸을 다분히 관음적인 시선으로 본다. 교복은 이미 육체적으로 성인이 된 이 모델들을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억압하고 관리하는 일종의 장치다. 한국 사회는 교복 입은 어린 여고생들을 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설정해왔다. 여고생의 교복은 그런 의미에서 금기가 작동하는 통제 장치이자 섹슈얼리티의 장치이기도 하다. 아울러 교복은 이중의 보호대다. 교복은 아직은 성년이 아닌 이 소녀들을 사회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 동시에 이 소녀들이 지닌 ‘폭발적이고 잠재적으로 일탈적인 생명력’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자 한다. 그들을 여전히 교복과 학교라는 제도 안에 가두면서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복의 표면은 늘 금기와 위반이 동시에 벌어지는 전쟁터 같은 곳이다. 소녀들은 교복을 가지고 성인 여성의 관능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옷, 기호로 수선한다. 혹은 청순하고 맑은 소녀상으로 연기하기도 한다.

교복을 입은 소녀들은 대지/현실(작가 작업실 옥상)에 거대하게 직립해 있다. 소녀들의 전면성이 기념비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거대한 이콘과도 같다. 결국 이 소녀들의 정체성은 내면이 아니라 전면에 있다는 얘기다. 우리들이 아는 소녀는 전면일 뿐이고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다리 뒤로, 몸 너머로 현실 풍경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그녀들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유리되거나 분리되어 보인다. 자기 삶의 토대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거인처럼 직립해 있는 이 기념비적으로 다가오는 육체는 너무 낯설다. 교복과 이름표, 신발과 양말, 나이와 고유명사 등을 통해 이들은 현존의 권리를 행사한다. 그러고는 교복으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자신의 성숙함 또한 부지불식간에 노출한다. 얼굴 표정, 상처와 여러 미세한 자국들, 교복을 수선해 입은 모습들이 모여 관리당하고 통제당하는 사회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생의 방식, 생존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이들의 몸은 막연한 불안과 기대, 불만과 욕망의 서식지다. 따라서 소녀들의 포즈에는 묘한 균열이 드러난다. 그 포즈는 학습된 포즈,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포즈, 우리 사회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습득한 포즈에 다름 아니다. 이들 소녀의 롤 모델은 어디에 있는가? 당연히 대중매체에서 이를 강력하게 전파한다. 드라마와 광고, 연예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십대 소녀들이, 여성들이 그런 역할을 표준화한다. 오늘날 십대 소녀들은, 아니 성년의 여성이나 남성들도 연예 문화에 익숙해서 그 문화가 생산해내는 틀에 죄다 길들여져 있다. 그들은 모두 연예인이다. 아니, 연예인을 흉내 낸다. 연예인의 패션과 몸짓을 시뮬레이션한다. 그래서 그런 몸들은 이상하게 불안하고 슬퍼 보인다. 허망해 보인다.

소녀들의 몸짓과 시선은 결국 우리 사회(남성 혹은 그 남성의 시선을 내재화한 여성)가 요구하는 시선의 욕망에 의해 스테레오타입화된 포즈다. 여학생들은 그 시선에 따라 연기한다. 어딘지 모르게 소녀들에게서는 사회와 현실로부터 방치되거나 배제된 느낌이 든다. 그들의 자리가 그렇고, 얼굴과 표정이 그렇다. 그들은 아직 성인은 아니지만 이미 소녀도 아닌, 매우 불확실하고 모호한 지점에 자리한다. 그래서일까 이 중간 계조의 회색 톤에 가까운 흑백사진은 연약하고 여리고 미묘한, 애매한 소녀상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그러니까 회색은 소녀들의 그 모호하고 불안한 정체성을 은유한다.

 

알다시피 오늘날 우리는 기표 혹은 상징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그 세계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거짓된 삶을 조직하는 미디어의 재현 장치들과 수많은 상징적 기표들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까? 이미지로 가득 찬 세상은 라캉의 주체처럼 시선과 응시가 분열된 시대다. 정치와 자본, 문화가 만들어놓는 거대한 일상의 상징체계에서 주체들은 자신의 욕망을 얼마나 자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까? 대다수는 상징체계가 생산하는 기표들을 욕망하며, 그것이 마치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기뻐하며 기꺼이 차용한다. 주체의 이미지와 동일화하는 효과는 표상체계를 넘어서는 욕망의 탈주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하게 하며, 욕망의 생성이 표상체계의 회로를 전제하지 않고 순수하게 실현 가능한 것인지 질문하게 한다.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우리를 응시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응시가 지배하는 세계는 충만한 시니피앙의 세계다. 하지만 그 세계는 원천적으로 결핍되어 있고, 그래서 쉽게 탈주하기가 어려운 세계다. 라캉이 주목하는 응시의 관점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영역에서 나에 의해 보이는 응시다. 말하자면 응시의 시점이 주체에게 다시 회귀하는 것이다. ‘내가 본다는 것을 본다’는 응시 시점의 회귀는 수많은 시니피앙의 대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와 소비재가 존재하는 시대에 주체가 지닌 욕망의 원리를 보여준다.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지만 결국 자신에게 회귀되는 욕망인 것이다. 응시는 엿보고 있는 그를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하며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문제의 응시는 바로 나를 놀라게 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타자의 현전이다.    

 

2006년에 들어와 그는 ‘화장소녀’들을 발표한다.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소녀들을 모델로 삼아 찍은 이 사진은 연기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주변에서 찾은 평범한 십대 소녀들을 찍은 사진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연예 문화에 영향 받은 화장을 과감하게 하고 노골적으로 연기한다는 점이다. 한결같이 공들여 (획일적인) 화장을 했고, 붙임머리와 매니큐어, 속눈썹, 눈 화장, 보톡스를 맞은 아랫입술, 서클 렌즈로 치장을 했다. 화장뿐만 아니라 옷과 양말, 신발 등도 모두 그렇게 유사하게 편재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기이하게 흩어져 있다. 근접해서 보여주는 얼굴에는 솜털이 가득하고 여드름 자국이 선연하며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은 부분적으로 벗겨져서 흉해 보인다. 얼굴은 이미 성인 여자인 양 짙은 화장을 했지만 아직 볼 살이 채 빠지지 않은 동안의 얼굴이고, 정작 양말은 만화 캐릭터가 있어 희화적이며, 다리는 온통 멍이 들고 지저분하다.

이 부조화가 얄궂다. 아니, 오형근의 시선이 좀 잔인하다. 그는 얼굴은 부재하고, 오로지 몸통과 다리 사이, 성적으로 민감한 부위라서 상상력이 발동되는 긴장감 있는 부위에 초점을 맞춘다. 소녀들은 그곳을 보는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이를 즐기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할 것이다. 결국 소녀들은 남자들이 자신의 어느 부위를 보며 무엇을 상상할지를 알고 그에 따라 연출하면서도 동시에 내심 떤다. 성인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섹시하고 관능적인 동시에 귀여운 분장을 하고, 이를 통해 동시대 남성과 오빠들의 시선에 조응하면서도, 그렇게 연출하면서도 어딘지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신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러나 또한 남자의 시선을 외면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서 살기에 힘든 부분이다. 근대 이후 여성의 몸은 남성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었고 그에 따라 그 시선이 요구하는, 욕망하는 선에서 몸을 연출하는 것이야말로 여성들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녀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런 시선을 내재화하고 여성으로서의 생존의 길을 공들여 가꾸어 나간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마치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듯하다. 텔레비전에 등장한 연예인들, 십대 소녀 가수들, 만화 속 주인공의 외양을 모방하는 것이다. 코스튬 플레이는 만화나 게임 캐릭터 등 현존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를 의상과 소품, 동작 또는 상황 묘사를 통해 재현하고 즐기는 젊은 세대의 새로운 문화이다. 이것은 대중문화 속에서 자신의 단면들을 투영할 대상을 찾고 표출하는 새롭고 적극적인 자아 찾기 방식이다. 동시에 그것은 대중문화가 설정한 정체성을 답습해나가는 일이다. 그것은 환상이자 가상의 자아상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소녀가 주인인 시대다. 모두들 소녀와 소녀의 육체, 소녀다움에 열광한다. 누가? 남자들과 오빠들이, 어린 여자를 선호하는 이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모두가 동안을 동경하고 악착스레 어려 보이고자 한다. 귀엽고 섹시하고 어려 보이는 문화와 패션이 주를 이룬다. 어그 부츠를 신고, 화장을 하고, 깜찍하고 만화적인 캐릭터와 패션으로 치장하는 것은 그래서 대세다. 그것은 어려 보이고 싶다는, 영원한 소녀로 머물고 싶다는 욕망이다. 왜?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들이, 소녀들이 그런 캐릭터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 또한 남자들의 시선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이 사진 속 소녀들은 거의가 유사한 화장과 패션으로 자리하고 있다. 무표정하며 긴장하고 있는 것도 같고 어딘지 슬퍼 보이기도 한다. 그녀들은 슬픈 표정으로 공식화되어 있다. 정서적 컨트롤은 배경의 색조가 강렬하게 대신한다. 소녀들은 무표정한데 그 눈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나는 이 눈, 서클 렌즈를 끼고 눈 화장을 하고 있지만 도저히 가리거나 치장할 수는 없는 이 눈에 담긴 표정이 진정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 눈이 발화한다. 연예 문화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빌려온 이 소녀들은 얄팍하게 살아오고 있음을 드러낸다. 차갑고 잔인하게 밀착해서 보여주는 소녀들의 얼굴은 모공과 잔털과 떠버린 화장, 경박하고 추한 분장의 가식을 까발린다. 그 디테일들은 결국 사진이 멈춰 있기에 관찰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 스틸 사진은 오랫동안 응시하고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세밀하게 디테일을 바라보고, 그로 인해 모종의 감정선이 누수된다. 결국 사진의 디테일이 발화한다. 그 사진 속 대상이나 거창한 주제, 소재를 찍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정지되고 고요한 사진 이미지만이 해낼 수 있는 힘과 지점에서 폭발한다. 현실보다 더 핍진하게 설명하기에 그것은 거의 초현실적이다. 더 솔직해서 더 부정적이다. 디테일이 내러티브다! 결국 그 디테일을 읽어내는 것이 오형근이 정작 하고 싶은 말이다. 좋은 사진작가란 그 디테일, 그 부분을 응시하고 읽어내면서 그 단서가 결국 모든 것을 대신해 발화하게 하는 것이다.

 

박영택(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