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여고생
청소년 하위문화 연구자인 딕 헵디지(Dick Hebdige)는 이렇게 말한다. “젊은이는, 그 현존이 문제가 되거나 문제로 간주될 때에만 현존한다.” 이 명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타당하다. 제도 언론이 원조교제, 폭주족, 미혼모 또는 채팅과 같은 ’10대 온라인 탈선’ 등을 다룰 때 이 명제는 진실이 된다.
반면에 오형근의 도감적 이미지 속의 여고생들은, 한눈에 보기에는, 여전히 사회의 헤게모니가 그어 놓은 선 안에 있는 듯하다. 이들은 아직 탈선하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로 이 여고생들을 일, 이년 뒤에는 단란주점이나 룸살롱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 오히려 제도 언론의 이런 상투적 관념에 대해 오형근의 이미지는 모종의 예술적인 이의를 제기를 하고 있다.
오형근 사진의 여고생들이 다소간에 순종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인 듯하다. 하나는 자신들의 욕망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라를 통한 작가의 프레이밍 때문이다. 작가가 주로 연기학원에서 캐스팅했다는 이 여고생들은 대중소비사회에서 스타로 성공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회가 그어 놓은 제도적 선 안에 정렬하고 서 있다. 다른 한편 작가는 교복 입은 이들의 사진 이미지를 통상의 ‘참한 여고생’과 같으면서도 사뭇 다르게 프레이밍한다.
교복은 이미 육체적으로는 충분히 성인인 이 모델들을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억압하고 관리하는 일종의 장치다. 알다시피 통제 장치로서 교복의 의미는 대중문화 안에서 은폐되고 호도되어 왔다. 예컨대 가수 이효리를 스타로 만든 TV 프로그램 ‘쟁반 노래방’에서 교복이 현상적으로 갖는 기능은 학교에 대한 즐거운 추억을 매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추억되는 가창 시간은 육화된 기억력과 협동정신과 체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효리가 섹시한 의상과 율동으로 무대 위에 서는 순간, 이 교복의 은폐된 의미는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부장제적이고 남근적인 시선을 기준으로 놓고 말하면, 이처럼 한국 사회는 때로는 은밀한 층위에서 또 때로는 아주 노골적인 층위에서 언제나 교복 입은 여고생들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설정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고생의 교복은 통제 장치일 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의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반면에 오형근의 사진은, 여고생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음증적 욕망을 상당히 절제되고 다소간에 탈색된 토운으로 보여 주고 있다. 오형근의 사진에서 호명되고 있는 여고생은 우리가 전철 안에서 혹은 동대문의 대형 의류 쇼핑몰에서 만나게 되는 10대 여성과는 다르다. 어쨌거나 그들은 사진/교복 안에 갇힌 채로 재현되는 것이다. 게다가 모델들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리고 작가가 설정한 프레임의 한계 이쪽에서, 다소곳하게 자세를 취한다. 일상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바의 도발적이고 극단적으로 컬러풀한 튀는 모습과는 영 다르다. 또한 최근 10대 네티즌들을 열광시킨 바 있는 몸짱 아줌마의 나이가 39세라는 점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분단선이 세대적으로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가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적어도 40대 이전까지 육체 이미지 중심의 대중소비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단연코 10대인 것이다.
그런데도 오형근의 사진에서 10대의 모델들은 납작하게 눌려 있다. 일상 현실에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10대 특유의 사회적 이질성과 문화적 완력이 거세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반사를 죽이고 중간 계조에 집중된 여기서의 사진 테크닉이 더욱 그러하게 만든다. 오형근의 사진은 관음적 욕망과 그에 상응하는 자기 현시 욕망을 재현한다는 일차적인 의미 연쇄의 바깥으로 곧장 달아나 버린다. 예컨대 몇 년 전 도발적이고 거친 방식으로 제도권 미술 안으로의 반입이 시도되었다가 된서리를 맞은 최경태의 포르노그라피 그림들과 오형근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차이는 명백하다. 혹은 미술관 안에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아라키의 퍼버전(perversion) 계열의 작품들과 비교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자면, 오형근은 10대에 대한 새로운 취향을 제시한다고도 할 수 있다. 10대 소녀에 대한 취향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서구 사진사에서 루이스 캐럴의 소녀 사진들을 상기해낼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거울나라의 엘리스>로 잘 알려진 루이스 캐럴은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 서품까지 받았으나 일생 동안 독신으로 지내면서 옥스퍼드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그는 귀여운 소녀를 좋아하여 지인의 딸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면서 이들에게 이야기도 해 주고 이들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특히 루이스 캐럴의 사진은 1860년대 아마추어 사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캐럴의 사진 속에서 소녀들은 옷을 입고 소파에 누워 있기도 하고 알몸으로 앉아 있기도 한데, 전체적으로 보아서 10대 초반 소녀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캐럴의 탐구와 취향은 극도로 절제되고 승화되어 있는 편이라고 여겨진다.
오형근이 다루는 10대는 한국의 하이틴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모델들은 소녀라고 하기에는 육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미 너무 나이를 먹어버렸다. 학교라는 제도와 교복이라는 장치에 갇혀 있는 이 모델들을 사진 이미지를 통해 오형근이 여고생으로 호명해 내는 목소리는 고음과 저음이 모두 약화되어 있다. 그래서 이 여고생들은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자극하기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모종의 결여감 내지는 결핍감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이 모델들에게는 무언가 실체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진의 트라우마(Trauma)에 대한 바르트의 표현 방식으로는, 작가 오형근이 ‘거기에 있었어야만 했지만 그는 그 결핍감을 뭐랄까 ‘방치’해 두는 방식으로 재현해 보여 주는 것이다.
이때 ‘거기’란 정확히 어디인가? 일단 여고생들에 대한 사진적 응시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고생이라는 설명의 어휘는 역시 아주 심각할 정도로 사회적 의미가 은폐되어 있다. 아직 성인은 아니지만 이미 소녀도 아닌 사회적 존재들의 섹슈얼리티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회적 현실 자체는, 이렇듯 방치하는 방식에서는 잘 보여지지 않는다. 반대로 이러한 사회적 현실의 맥락은 결국 프레임 바깥으로 제거되는 방식을 통해 구성된다. 즉 이 사진에서 구현되는 정체성에 대하여 사회적 현실의 맥락은 일종의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로서 환기되는 것이다. 설령 프레임 안에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초점을 벗어난, 강 저편의 아파트 단지 정도로 현존할 뿐이다.
내가 보기에 오형근의 사진은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근거로 이들을 여고생이라고만 호명하고 있는가. 왜 이들은 교복을 입은 한에서만 사회 안에서 군생(群生)하는가. 이렇듯 금지와 억압의 ‘보호대’인 교복 안에서 이들의 몸과 육체와 욕망은 얼마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가.
내가 지금까지 찾아낸 답은 다음과 같다. 교복은 이중의 보호대다. 교복은 일단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아직 성년이 아니라는 레이블을 통해 이들을 보호한다. 동시에 그러나 실은, 이들의 폭발적이고도 잠재적으로 일탈적인 생명력으로부터 취약하기 그지없는 한국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제도 언론이 소위 10대의 일탈 운운하면서 프레이밍하여 구성하는 바의 이들의 정체성에 한국 사회가 기생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10대들이 인터넷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미지를 생산하고 전유하는 수준과 방식은 이미 제도 언론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버렸다. 10대들은 주변의 얼짱 이미지를 올리기도 하고 또 그런가 하면 다시 얼짱의 정체 즉 과거 이미지를 폭로하기도 한다. 성장하기 전에, 수술하기 전에, 화장하기 전에, 혹은 에이전트사의 스타일리스트 손을 거치기 전에, 오늘날의 스타들이 무심결에 의외로 엉망인 채로 찍었던 이미지들을 폭로해 내는 것이다. 또 이들은 자기와 타인의 이미지들을 합성하고 여기에 낙서 등의 문자 텍스트를 결합시키면서 이미지를 가지고 논다. 이러한 이미지의 ‘난장 꿀림’을 염두에 두면, 외형상의 강력한 도덕적 규제력에도 불구하고 제도 언론이 10대를 프레이밍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적으로 아주 기생적이며 실제로는 결국 아주 취약하다는 것을 우리는 통찰하게 된다.
제도 언론의 상투적 프레이밍과는 달리, 오형근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실존하는 실명의 10대 여고생과 교섭한다. 10대 모델들은 그의 사진 속에서 일일이 살아 있다. 물론 이 개별적이고 개성적인 현존이 첫 눈에 혹은 한 눈에 잘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형근의 아줌마 사진들과는 달리, 이 10대 모델들은 상당수가 전신을 카메라 앞에 노출한다. 그들의 이름표, 그들의 신발, 나이, 고유명사 등을 통해, 그들은 현존의 권리를 행사한다. 그들의 머리칼을 가볍게 날리는 바람과 대기, 그리고 그들의 포즈와 그림자는 그들의 현존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낸다. 그들은 교복으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자신의 성숙함을 노출시킨다. 그들의 목, 팔, 다리, 맨발의 어떤 불균형, 그리고 무엇보다 팔다리의 상처와 갖가지 피부 트러블을 통해 그들은 사진 속에서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상처와 딱지들은 그들이 일상 생활을 통해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회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 준다.
한편, 연기학원의 학생들이라고는 하지만, 인터넷 얼짱 이미지의 주인공들과 비교해서 떨어지는 이들의 얼굴 생김새와 몸매는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 작가의 의도적인 캐스팅의 결과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이들의 얼굴 생김새는 얼짱 이미지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고, 대체로 다리는 짧고 굵다. 이들의 포즈는 나름대로 각자가 계산하여 나름대로 애써서 적극적으로 연출해 낸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요염하거나 유혹적이지도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쿨하거나 큐트하지도 않다. 아마 실제로 그들이 그러해서라기보다는 작가가 유도해 내고 교섭해 낸 결과이고 효과일 것이다. 물론 그래도 미처 완전히 포착되지 못한 잠깐의 틈 사이로 빛나는 이 10대들의 육체, 그 불안과 기대, 불만과 욕망의 서식지는 충분히 아름답다, 고 말해도 좋다.
결국 이 여고생 모델들이 납작하고도 희미하게 눌러 붙어버린 이미지로 현존한다는 것은, 이 모델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 관념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의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대담하고 도발적이면서 시끌벅적한 방식의 활달한 에로티시즘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작가가 재현한 사진 이미지들은 제도권 언론에 의해 프레이밍된 상투적 고정관념들과 인터넷에서 실제적으로 활용되고 사용된 이미지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이다. 예컨대, ‘마루’ 사진에서도 그들의 얼굴은 통상적인 방식보다는 더 작은 비례로 둥근 프레임 안에 자리잡는다. 신문과 졸업 앨범에서와는 달리, 오형근의 사진에서는 교복 상의가 둥근 프레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오형근의 작품 안에서 한국의 10대 여성 모델들은 묘한 슬픔을 자아낸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슬픔보다는 일종의 안타까움이다. 제도 언론의 규정에 의하면 이미 상당수가 탈선하고 있는, 따라서 얼마든지 탈선할 수도 있었을 모델들은 나름대로 표정과 포즈를 맘껏 취해 보았지만 그 효과에 있어서는 상당히 밋밋하게 눌러진 채로 재현되고 있다. 마치 이제는 한가한 포구에 묶여서 오후의 스러지는 햇볕 아래 놓여 있는 낡은 배처럼 말이다. 낡은 배라니. 그들은 이제 겨우 20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나이가 아닌가. 그들이 응시하고 있는 카메라는 그들의 불안한 미래와 그들이 현재 놓여 있는 사회적 상황을 대신한다. 그들은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염두에 두면서 이 카메라와 타협한다.
엉뚱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델들의 사진 이미지는 살얼음처럼 얼어 있다고 느껴진다. 스틸 카메라라는 기계 특유의 순간적 포착 기능을 염두에 둔다고 하면, 그리고 TV카메라와 영화 카메라에 대한 우리의 대중적 체험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그리고 이 카메라들이 10대를 표상하고 재현해 온 바의 방식과 수준을 염두에 놓고 말한다면, 이 살얼음의 이미지들은 한국 사회로서는 전혀 새로운 경지의 취향인 것이다.
나는 이 살얼음 위에서 미끄러져 나가면서 오형근의 사진 이미지에서 여고생들을 구성하는 외부로서의 한국 사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아마추어이다. 한국 사회는 개별적으로 약동하고 살아 있는 10대들에 대한 통념적 이미지를 구성하려고만 한다. 제도 언론이나 TV 오락 프로그램, 10대가 주인공이고 관객인 영화가 다 그러하다. 이러한 대중적이고 지배적인 미디어에서 10대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발화는 기본적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판에 박은 듯한 가두 녹음(vox populi)으로만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투적 내러티브 및 판타지와 대척적인 위치에 바로 오형근이 있다. 이 아마추어적인 현실에 대해 오형근의 사진들은 잘 들리지 않는 불분명한 목소리로, 그러나 귀기울여 잘 들어보면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 따위의 해묵은 콤플렉스는 이미 충분히 극복되고 있다.
백지숙(미술평론, 전시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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