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시대의 인간탐구

신수진 / 사진심리학, 연세대 연구교수



오형근은 인물을 다루는 작가이다. 사진으로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시작부터 불리한 면이
없지 않다.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찍혀진 대상의 이름을 찾게 만드는 힘이 강하고,
인물은 아무리 적은 비중으로 찍혔다 하더라도 강력한 화면 장악력을 지닌다. 따라서 소재로서 인물 다루기는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나 감흥을 전달하고자 할 때, 특히 오형근과 같이 섬세하게 조율된 일정한 톤으로 말을 건네고자 할 때 지극히 까다로운 과제가 된다. 사진 소의 인물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다. 서로 다른 얼굴로부터 추출되는 서로 다른 이름을 넘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때로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대화한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거나, 작가가 무엇에 관심을 갖느냐는 세상의 사람만큼 많은 선택지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기억, 경험, 정서, 취향과 같이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로 자신의 생각을 마름한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보는 사람들이 지닌 동일한 자원들과 만나 효과를 발휘한다. 같은 때 같은 곳에서도
다른 생각을 품는 개개인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작품을 매개로 공감되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승화되는 경험은 예술의 가장 신비한 기전이다. 오형근의 작품을 통한 작가와의 대화는 그가 작품을 통해서 다루는 인물들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들을 담는 방법으로서 사진은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오형근이 선택한 소재와 표현방법은 어떤 소통을 이끌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작업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표정에 나타난 본연의 갈등 요소들
오형근의 작업은 <미국인 그들(American them)>(1989~1991)로 시작되었다. 작가 스스로도 이후 20년 가까이 이어지는 <이태원이야기>(1993~1994), <광주이야기>(1996),
<아줌마>(1999), <소녀연기>(2004), <소녀들의 화장법>(2007~2008) 등 거의 모든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계기였다고 평가하는 출발점이다. 그는 유학시절 공부를 마치고 두 번에 걸쳐 미국을 종단하는 여행을 하면서 웨스트버지니아, 켄터키, 미시시피와 같이 상대적으로 정체된 지역에서 만난 미국인의 모습을 담았다. 길에서 만난사람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내면을 들여다보았다기보다는 카메라를 든 오형근의 눈에 띈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주인공들이 사진 속에 있다. 그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면서 동시에 매우 개성적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특징을 지녔다. 개성적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특징을 지녔다. 개성적이라는 것은 대개 익숙하지 않은 특별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오형근의 눈에 잡힌 그들은 완전히 낯설지 않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TV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차림이나 캐릭터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들이 그들과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귀국 후에 발표한 <이태원이야기>는 그에게 익숙한 장소를 배경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이태원은 서울 도심에 가까운 곳이면서도 변방 혹은 이종교배(異種交配)의 속성이 강한 지역이다. 그곳에서 오형근은 잊혀진 배우나 가수, 유흥업 종사자, 게이들을 찍었다. 무기력하고 불안정하게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있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이태원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맞물려 혼란과 좌절감을 전해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형근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의 작품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찍히는 사람이 특별해서일까? 아니면 그가 구사하는 사진적 어법이 그들을 유난스럽게 보이도록 마든 것일까? 해답은 이후에 그가 발표한 일련의 인물군을 촬영한 사진들에서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아줌마나 여고생을 소재로 한 작업은 그의 사진이 유별난 삶을 살아온 개개인의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지닌 본연의 갈등 요소들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지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캐스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도 그들을 찾아낼수 있어요. 그들은 한 순간에 나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미국인 그들>을 작업할 때 카메라 앞에서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카메라 없이 무심코 길을 가다가도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저의 눈을 끌어당기는 걸 느낍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왜곡이 있습니다. 상처나 흉터 같은 것이죠.” 그가 말하는 왜곡이 외상(外傷)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 혹은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그가 잘 찾아낸다는 것인데, 알듯 모를 듯하다.

오형근 식 기형(畸形), 중간인이자 경계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일생을 통해 경험하는 난관에 경중의 차가 있긴 하겠지만 어차피 좌절이나 고통은 주관적인 것이어서 남겨진 상처는 누구에게나 흠결을 남긴다. 그렇다면 오형근이 말하는 자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왜곡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작가 자신만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동질적인 고통을 품고 있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진동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만일 내가, 또는 오형근이 아닌 누군가가 사진에 담긴 주인공들을 길에서 마주친다 해도 그들이 특별하다거나 기이하다고 느끼기는 힘들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 특히<아줌마> 이후의 작업에서 얼굴을 보여준 사람들은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 1923~1971)의 사진에서 처럼 누구의 눈에나 기형적으로 보일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아버스와 유사하게 타인의 ‘결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사진이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주체적 권위를 부여하거나 그것을 통해서 전환적 시대의 불안정한 정신을 이야기하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오형근 식의 시형은 따로 있다. 그들은 중간인이며 경계인이다. 명백하게 소외된 그래서 아무런 해석이나 변형이 덧입혀질 필요가 없는 인물들은 그의 사진에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도 양로원의 노인이나 소록도의 나환자, 고아원의 아이들처럼 이미 소외자로 낙인된 대상은 작업적 관심 밖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평소엔 자신의 상처를 잘 끌어안고 살아가지만 그 이면에는 치유되기 어려워 누군가의 눈에 잘 띄고 마는 흉터를 지닌 사람들이다. 오형근의 초기 사진에서 그들은 자의식이 매우 강하거나 실제로 정신적 이상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근작으로 올수록 그들은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동시에 언제나 위태로울 수 있는 존재들이 되고 있다. 또한 지난 10년간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아줌마><소녀연기><소녀들의 화장법>에서 모든 등장인물은 한국 여성이다. 그리고 그들의 연령은 점점 낮아져 왔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존재 자체로 남성보다 더 많은 흉을 안고 살아가는 것인가?
작가는 “꼭 여성을 찍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사회생활을 하는 한국 남성들은 자신을 완전히 가리는 마스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자신의 얼굴에 드러나는 왜곡을 지우는 법을 배운 거지요. 그에 비하면 아줌마나 10대 여성들에게선 내밀한 갈등이 드러나도록 내미는 얼굴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남자라서 더 잘 보는 건지도 모르지요”라고 말한다. 이는 오형근이 바라본 여성들은 한국인, 여성, 아줌마, 혹은 소녀 등의 집단 혹은 인물군으로 이름 붙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주목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그중 한 사람의 모델이 대중매체에서 유포하는 미적 기준에 심취하여 특정 여배우의 차림새와 자태를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상처를 온전히 사회적인 문제로 돌릴 만한 근거가 오형근의 작품에는 없다. 그들은 오형근에 의해서 선택되었고 그런 모습을 카메라 앞에서 드러내도록 유도되었으면, 그 과정에서 특정한 감정을 연기하도록 슬그머니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감성적인 측면을 표출시키기 위해서 작가가 적극적으로 연출한 사진을 사회적 의미에 초점을 둔 작업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1999년<아줌마> 연작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파장은 일면 예술 외적 해프닝이었다. 작가와 그 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사회적 이슈에 별 관심이 없는데, 가부장적 권력에 익숙하고 그래서 그 권력을 전복하려는 시도에 민감한 얼론은 그 작업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며 열광했다. <아줌마>에 과도하게 부여되었던 사회적 의미는 여고생을 소재로 한 <소녀연기>에서 다소 거품이 걷혔다. 동시에 그의 작업에 내재된 진정한 사회 문화적 함의도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객관적 시각언어로 전환된 주관적 정서
<소녀연기>가 완성되기까지 오형근은 <여고생><연예연기학원>이라는 제목의 작업을 진행하면서 작가노트⁽¹⁾에 그들을 ‘불안정한(Ambivalent)’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여고생들이 보여주는 불안정성 혹은 양성성의 근원을 ‘소녀와 여자 사이’의 경험으로 규정하고, 그 모호한 시기의 정서적 흔들림을 가능한 한 세분화하여 다루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줄곧 그의 관심을 끌어온 ‘중간인(혹은 경계인)’을 중간인답게 하는 특성이 ‘정서’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계층이나 낙인 혹은 분류와 같은 이슈는, 비록 그것이 작가의 예술적 관심사로 작품에 반영되는 경우라도, 개개인의 정서적 경험에까지 세밀한 관심을 기울이진 못해 왔다. 오형근은 관심의 초점을 사회적 이슈가 아닌 개인의 심리적 경험에 둠으로써 감성에 기초한 사회적 유형 탐구의 가능성을 열게 된 것이다. 이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그는 일정한 작업의 규칙들을 좀더 엄격하게 적용하게 된다.
그것은 일련의 기법들과 같은 사진적 조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몇 가지 기본이 되는 방법들이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효과를 일정하게 유지함으로써 서로 다른 인물의 이름을 뛰어 넘는 정서적 공통지대를 드러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피사체’, 즉 주인공이 되는 인물은 화면의 중앙을 차지한다. 주피사체의 비중은 매우 커서 배경의 다른 요소들이 주인공을 설명하는 힘은 최소화되었다. 여고생 이후에는 배경이 단순화되기까지 하는데, 그 결과 설명적인 요소들은 더 줄어들고 배경의 의미는 ‘밝기’의 문제로만 남게 되었다. 카메라의 위피를 낮추어서 약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시각은 현실적인 원근 단서들을 배제시키는 효과를 만들었다. 배경에 찍힌 하늘은 구름과 한강변이라는 참조적 구성 요소들과 관계없이 섬세하게 조절된 중간 농도의 회색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여전히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주인공들은 카메라로 다가서거나 물러나 도망가지 못하고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붙들려 있다.
조사거리가 짧은 정면광, 즉 제한된 광량의 정면광은 이전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을 배경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단순한 배경에서 인물을 떼어내기 위한 정면광은 훨씬 교묘하게 효과를 감추고 있다. 실제 주인공이 여고생과 배경이 된 하늘의 밝기차는 모든 작품에서 일정하게‘0.5단계stop’으로 유지되었다, 또한 <아줌마>에서 쓰였던 전경과 배경의 엄청난 밝기 차의 조명비가 만들어낸 시각적 경계는 여고생을 다루면서 원형프레임으로 대체되었다. 작가는 주인공에 대한 집중도를 유지하면서 여고생들의 정서적 특징을 대변하는 새로운 지대를 표현하는 방법을 그와 같이 찾은 것이다. 오형근이 구사하는 테크닉은 강박에 가깝다. 자신만이 발견해낸 결함 있는 자들의 마음을 모든 사람이 발견토록 하기 위해서 그는 사진을 통해 주관적 정서를 객관적 시각언어로 전환하려 드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감성은 서사를 압도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우리 시대의 화두이기도 하다.⁽²⁾

불안한 내면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전면성(前面性)
감정은 인강의 삶의 질을 결정하므로,⁽³⁾ 그의 사진은 불안정하고 이중적인 감성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정서는 대게 얼굴을 통해서 표현되며 이는 타인과 나를 연결시키는 강력한 비언어적 의사소통 수단이다. 오형근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얼굴에 정면으로 비춰지는 조명을 반사해냄으로써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정서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 신호는 모호하다. 정서는 아주 순식간에 시작되며, 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알아내는 것은 매우 힘들뿐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감정 신호를 완전히 읽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녀들의 화장법>에서 이 문제는 얼굴 표정 이외에도 의상이나 꾸밈새로 확장된다. 소녀들에게 옷차림이나 화장술은 주어진 것과 선택된 것 사이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옷가지와 화장품을 고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능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눈에 그들은 유행의 주변에서 어설프게 다른 사람의 취향을 흉내내는 자들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형근은 이러한 모호함을 그 자체로 단호하게 드러내는 방법으로 ‘전면성(前面性)’을 채용해 왔다. 모호한 그들의 정서적 정체성을 인물들의 전면성을 통해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진은 모델의 뒷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카메라를 향해 내미는 전면만을 볼 수 있다. 눈을 부릅뜨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그 뒤에 서서 이런저런 사항들을 지시하던 작가와 정면으로 맞서는 소녀들의 모습은 놀랍다. 사진 속 그들에겐 범접하기 어려운 자신들만의 세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허술한 써클렌즈를 낀 눈, 유치한 만화가 그려진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을 신은 발, 조금이라도 더 여자처럼 보이고 싶은 입술, 이 모든 것이 광채를 발한다. 하지만 그 마법은 그들이 잘 마름된 배경 앞에서 대형 카메라로 찍어서 대형프린트된 사진속에 있을 때만 유지되는 것이다. 그들이 사진 밖으로 나가는 순간 황금마차는 호박으로 변한다. 오형근은 그들의 전면에 부여한 마법의 힘을 극대화함으로써 불안한 내면의 허술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통해 소녀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전서적 유형을 찾고자 한 것이다.
사진은 과연 정서를 유형화하는 도구로서 얼마나 적합한가? 일정한 방법과 재현을 통해서 특정 대상들이 느끼는 정서를 탐구함으로써 관심대상을 규정하는 시각적 규범을 추출해낼수 있다면 그것은 감성에 대한 시각적 유형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⁴⁾ 지금까지 오형근의 작품들은 일면 이런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모델에 대한 작가의 장악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형지물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사진작업에서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모델과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이때 작가는 모델이 표현하는 바에 반응하거나 반대로 모델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게 되는데, 오형근의 작업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모델에 대한 작가의 장악력이 모델의 자의적 표현성을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소녀연기>와 <소녀들의 화장법>에서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심한 듯 슬픈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작가에 의해서 조직된 바이다. 실제로 눈매나 입매가 어떻게 변할지 예상할 수는 없었겠지만 작가는 그들에게서 부정적 정서 반응(Negative feeling)을 유도하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정교한 연출과 그에 대한 모델의 반응이 교차하는 지점을 주목해 볼 때, 엄밀히 말하면 오형근의 작업은 감성의 유형학적 접근을 위한 사진이 아니라 자신이 찾아낸 감성의 유형에 대한 사진적 재현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오형근의 작업은 경계인들이 느끼는 감성에 개한 탐구였다. 그리고 이것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그가 지닌 동지애적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작업은 틀 잡힌 형식미 속에서 미묘하게 작용하는 정서들을 세분화시켜 왔다는 면에서 독특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각적 의사소통이 감성적 도구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도구로 하는 감성 탐구의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향후 오형근의 작업이 지니는 사회 문화적 의미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비언어적인 것을 비언어적인 방법으로 탐구하는 일이야 말로 예술의 영역 밖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접근이기 때문이다.

1) <도감전시진집>푸른세상, 2003.
2) 감성 연구는 근대 이성에의 회의로 인해 대안을 찾는 방법으로 20세기 후반에 대두되었으며, 인간에 데한 다면적인 해석을 완성시키기 위한 관점들이 일반적이다. 근자에는 감성적 원리와 효과에 대한 관심이 철학, 인지과학, 심리학의 영역뿐 아니라 정치, 경영, 마케팅의 대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3) 비언어 의사소통의 전문가인 폴 에크먼(Paul Ekman)이 그의 명저 <얼굴의 심리학>(2003) 을 시작하는 명제이다. 그는 지난 40년 동안 삶의 질을 좌우하는 지표가 되는 정서를 얼굴 표정을 통해서 연구해 왔다.
4) 지금까지 대부분의 감성 연구자들은 인간의 감성을 유형화하기 위하여 언어적 도구, 즉 형용사 어휘를 이용하는 연구 방법론을 개발, 활용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