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근의 인물사진: 얼굴의 앞, 그리고 뒤
Hein-kuhn Oh’s portrait photographs: the front and back of the face

“그가 몸을 돌려 바라보았을 때, 그는 투명한 빛 밖에 볼 수 없었다.”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
-Henry James, <The Turn of the Screw>

오형근의 흑백 인물사진들은 짙은 회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한다. 그것은 뭐라 부를 수 없는 이상한 심연처럼 거기에 있다.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전면의 인물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어렴풋한 사물들의 윤곽이 없다면 그저 유사한 톤의 얼룩들로 보아도 좋을 만큼 동일한 계조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마치 어둠으로부터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있다. 전면에서 터뜨린 플래시의 짧은 심도로 인해 명확하게 떠올랐다가 금세 다시 사진의 짙은 계조 속으로 파묻혀 버릴 것 같은 인물들은, 그 빠른 순간만큼이나 강렬하게 자신들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흡사 어두운 야생의 수풀 속에서 느닷없이 카메라에 포획된 동물들처럼 사진 속의 대상들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있다. 그의 사진 속에서 인물들은 플래시에 의해 전면으로 이끌려 나온 것처럼 보인다.

90년대에 미국에서 촬영한 <미국인 그들>로부터 <아줌마>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오형근의 흑백사진들은 다큐멘타리 사진의 형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독립적인 장르로서의 인물사진을 구축하기 위한 독자적 어휘들을 발전시켜 왔다. 이 시기에 작가는 강한 인공 광 플래시를 이용해 한낮의 빛 아래에서도 배경이 마치 짙은 저녁의 공간처럼 보일 만큼 피사체의 전면부를 밝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대상을 고립시키고, 인물을 배경으로부터 분리해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근거리에서 사용한 조명은 얼굴의 묘사에 있어 더욱 부드러운 계조를 허락한다. 인물들은 섬세한 표정들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강한 빛과 초점의 대비 속에 머물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얼굴을 위한 것이다. 대상의 얼굴, 표정을 담고 있는 밝은 표면, 플래시에 의해 예민하게 드러난, 밝은 회색의 톤들이 묘사하고 있는 이 특수한 영역을 다룰 어휘들 말이다.

오형근은 <미국인 그들>에 대해, 많은 미국인들이 그들이 본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서있거나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심지어 어린 아이들조차 카메라 앞에서 뭔가를 재현하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곧 이어 플래시가 터지는 그 짧은 순간, 인물들은 표정을 바꾸고 자세를 고친다. 그들이 인용하는 것이 존 웨인이나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인들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기억들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수없이 많은 가지를 지닌 하위문화의 구역들로부터 비롯되는 것들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지와 그것을 담고 있는 실체와의 사이에 아무런 경계를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인물들이 재현하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형근의 이 연작들에서 발견되는 단초는 이후의 그의 사진들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그것은 대상이 외부와 접하는 표면, 즉 얼굴 혹은 자세의, 들뢰즈의 용어를 빌면, 감화(affect)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 연약하고 섬세한 인물의 내면이 외부 혹은 세계와 접하는 면으로서의 이미지가 어떤 것을 재현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러한 감화에 의해 역으로 세계는 그것의 양상을 대상의 이미지 위에 드러내게 된다. 즉 얼굴 혹은 자세는 세계나 사회가 개인에게 각인하는 것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세계와 사회 역시 변용된 모습으로 재현된다.


일반적인 예술적 창작에 있어 사실과 픽션은 연출자의 의도를 따라 그 경계를 형성한다. 예컨대, 회화나 연극에 있어 인물은 그것을 묘사하는 작가의 기술적 개입을 통해 실제의 대상으로부터 변형되어 이상화되거나 허구적 성격을 띠게 된다. 반면 오형근의 사진 속에서 사실과 픽션의 경계는 이미 피사체로서의 인물 안에 내재되어 있다. 다시 말해, 피사체로서의 인물이 스스로를 이미지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복합적인 형식이, 마치 카멜레온이 주변 환경에 따라 자신의 색을 바꾸듯, 인물의 정체성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변용이 생성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그는 피사체를 특정한 계조 속으로 이끌고 그에게 카메라를 겨눈 뒤 플래시를 터뜨린다. 그리고 그의 사진에는 이 과정에서 검출되는 예리한 레이어들의 흔적이 기록된다.

오형근이 한국에 돌아와 찍은 일련의 사진들, <이태원 이야기>와 <광주 이야기>들에서는 인물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실과 허구의 조합들이 더욱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장소들은 각자 한국 현대사의 극적인 기억들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의 인물들은,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살아 온 장소이자, 주한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외국인 대상 업소들이 밀집된 이태원의 뒷골목과 80년 광주항쟁의 자취가 아직도 곳곳에 배어있는 금남로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카메라는 이들에게 장소와 사건들을 환기시킨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는 일상을 초월한 무엇인가가 자리잡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순환적 텔레스코픽’(circular telescopic)이라고 부를만한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영화 ‘꽃잎’을 촬영하는 금남로의 도심에 모여든 인파들은 배우, 엑스트라, 구경꾼, 경찰들 할 것 없이 모두 혼란스런 재현의 과정 속에 뒤섞여 있다. 카메라가 나타나면, 이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광주항쟁 당시의 인물들로 변한다. 마치 양자의 역학적 상태에서처럼 이들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재현(representation)과 그것의 제시(presentation)는 동전의 양면처럼, 얼굴의 전면과 후면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경험으로부터 오형근이 사진의 어떤 조건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각성을 얻게 되는지는 이후의 작품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아줌마> 연작은 이전의 흑백 인물사진들과 몇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첫 째, 피사체로서의 인물들은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더 강한 플래시의 조명을 받고 있다. 그리고 약간 아래에서 위로 향한 플래시의 방향은 인물들의 얼굴을 중심으로 화면의 나머지 부분에 어두운 테두리를 만들고 있다. 이 사진들 역시 모두 한낮에 촬영되었지만, 강한 인공광의 순간적 사용으로 인해 배경은 모두 정상보다 몹시 어두운 톤으로 가라앉고 있다. 이는 인물들을 더욱 분명하게 고립시킴으로써 이들의 불안한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는, 클로즈-업으로 얼굴을 확대한 데에 더하여, 인화과정에서 다시 사진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얼굴의 표면을 추상화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얼굴을 찍는다는 것은 표정을 지닌 면(面)을 기록하는 것이다. 실제보다 크게 확대된 얼굴은 다시 두 가지 요소들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전면에서 터뜨린 플래시에 의해 얼굴의 튀어나온 부분들에 생긴 번들번들한 반사들과 부드러운 계조의 필름을 사용하여 생긴 섬세한 중간 톤들이다. 사진의 확대는 이 각각의 요소들로 하여금 인물의 두 가지 상반된 양상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효과를 일으킨다.

물론 세 번째는, 아줌마라는 특정한 부류의 인물들이다. 이전과 달리 여성, 그 중에서도 중년의 일반적인 한국 여성을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분명 인덱스(index)로서의 사진이 수행하는 기능, 즉 이미지가 지시하는 대상의 복합적인 맥락을 좀 더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이들은 단순한 여성이라기보다는 특수한 문화와 행동방식을 대변하는 ‘부족’(tribe)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다만, 이 부족은 다른 사회적 구조와 유리된, 소속이 불분명한 부유하는 계층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들은 어머니이면서 가족의 성씨를 지니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대체로 뚜렷한 직업을 갖지 않는 모호한 부류의 집단적 유형을 대변한다. 이들의 강렬한 화장은 자세나 태도와 한 세트를 이루면서 한 여성이 아줌마라는 유형으로 분류되는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소녀연기> 연작은 <아줌마>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사진들이 특이함이 바로 한국의 소녀들을 찍었다는 사실일 만큼 한국에서 제대로 된 소녀 인물사진은 놀랍게도 매우 드물다. 아마도 ‘소녀’라는 부류의 존재들이 환기시키는 성적인 불안감, 욕망과 그에 상응하는 금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표현을 빌면, 그들의 존재를 특이하게 만드는 소녀라는 사실은 마치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과도 같다. 대상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나사를 한번 죄는 것이라면 그가 소녀인 것은 나사를 두 번 죄는 것이다.

아직 여성으로서의 선언과 발산에 이르지 못한, 풋내와 서투름, 어색한 자세와 동물적인 시선을 지닌 소녀들은 ‘아줌마’들과 다른 의미에서 더욱 모호한 부족을 이룬다. 이 두 부류의 여성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뚜렷한 정체성의 경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이들은 여성이 되어가고 있지만 여성이 아니다.

이들은 마치 변태를 앞둔 유충의 연약하고 관능적인 표피처럼 세계의 표면을 결백하면서도 상투적인 위험으로 채워 넣는다. 등장만으로도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순결함, 애틋함, 가녀림과 수줍음. 소녀들을 수식하는 이 표현들은 어느 순간 그것이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의 회의와 불안감, 불균형과 흐트러진 자세를 한층 더 당혹스런 것으로 조여 나간다. 오형근은 사진 속에 소녀들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소녀’라는 통념을 통해 알고 있던 대상들이 아닌 이상한 시기에 이상한 장소에서 살고 있는 어떤 존재들이다.

다른 사진들에서와 달리 이 사진들은 좀 더 부드러운 빛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비보다는 밝은 회색의 풍부한 계조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전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아무런 특별함도 없어 보이는 교복을 입은 이 소녀들을 발치에서 올려보며 촬영함으로써 이들을 마치 기념비들처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배경의 지평선은 모두 발목 정도로 낮아져 있으며 인물들의 배후에는 부드럽고 밝은 회색의 면, 즉 하늘이 펼쳐져 있다.

이 연작에서는 정면의 플래시와 밝은 하늘로부터 인물의 윤곽선을 분리해 주는 림(rim) 조명의 사용을 통해 사진 전체에 걸쳐 영화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제목의 ‘연기’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인물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이전의 작품들에서보다 훨씬 더 허구적이고 추상화된 공간이다.

연기학원에 다니고 있는 십대 연기지망생들을 캐스팅해서 촬영한 이 사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상으로부터 그것의 속성(attribute)들을 분리하여 재현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연기를 훈련받은 아이들이 스스로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것은 그 이미지의 출처에 대한 의문이다.

아이들은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되기 위해 어떤 것들이 보여져야 하는지를 스스로 되묻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경험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추출해낸 용법들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표정이나 태도로 재구성한다. 사실과 허구가 뒤엉킨 이 사진들의 표면 위에는 그렇게 해서 구축된 재현의 습관과 그것이 직조해낸 모호한 자의식의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소녀들의 화장법>은 <소녀연기>와 달리, 일상적으로 소녀들이 많이 모여드는 서울의 여러 번화가들에서 캐스팅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연기지망생들이 아닌 이들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나 스튜디오에 초대된 아이들이다. 12세에서 17, 8세에 이르는 이 소녀들은 스스로 터득한 얼굴화장법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거리에서 화장을 한 얼굴로 다니고 있었다. 처음으로 대형 컬러사진을 이용해 이들의 얼굴을 촬영한 이 연작은, 우선 대상들이 스튜디오에서 직접 화장을 한 뒤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포즈를 취했다고 하는 점에서 이전의 사진들과 다르다.

이 사진에는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긴장과 시간적 경과가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사진들은 <아줌마> 연작이나 다른 인물사진들보다 훨씬 더 크게 확대되어 있어 마치 독일의 유형학적 사진들이 보여주는 냉정하고도 극단적인 세부묘사를 상기시킬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유형학적 사진이 각각의 유형들의 공통점을 강조하고 차이점을 소거하는 반면, 오형근의 사진에서의 유형은 동일한 유형의 인물들로부터 차이들을 강조해낸다는 점에서 그 출발점을 달리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사진들 속에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대상들의 객관적 특질들을 드러내는 대신 각각의 대상들에 대한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즉 대상들은 사회적 레이어로서 추출되는 대신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객관화 될 수 없는 특질들로 인해 하나의 유형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가 선호하는 ‘도감’(圖鑑)이란 용어가 개념적 분류가 아닌 차이의 유형을 제시하는 복합적 장치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이 사진들은 전형적인 인물화의 회화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초점이 흐릿한 배경의 강렬하고도 추상적인 색면과 약간 몸을 틀어 화면에 운동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구도는 마치 고전주의 회화의 전통적 구성을 그대로 인용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낯익은 회화적 아우라가 입혀진 평범한 아이들의 이미지는 마치 이 아이들을 처음 보는 듯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알려진 기표의 영역 안으로 새로운 의미들이 밀려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 “이들은 길거리의 여자아이들이자, 의미화를 위한 투쟁의 장소다.”

<소녀들의 화장법>은 이전부터 오형근이 추구해 온 인물사진의 본령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것은 얼굴이 지니고 있는 기표(signifiant)로서의 추상성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경로로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탐구의 과정 위에 있다. 얼굴의 추상화는 그것이 완고하고도 가부장적인 기표로 사용될 때 권력, 의미, 의도의 조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기표일 때에도 그러한가? 이것이 오형근의 사진이 보여주는 매우 논쟁적이면서도 섬세한 영역이다. 그의 사진 속에서 불완전한 기표로서의 얼굴은 권력과 방어, 의미와 욕망, 의도와 방기(放棄) 사이를 배회한다.


서민층의 미국인들, 이태원의 뒷골목 사람들,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촬영장에 모여든 금남로의 시민들, 거리에서 만난 아줌마들과 소녀들은 스스로의 것이 아닌 어떤 것을 자신들의 일부로 재현하는 과정 속에 있다. 오형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대상의 일부가 사진 속에 기록되는 과정을 조직한다. 그것은 모든 사진들이 그러하듯이 시공간과 장치를 배치하는 일련의 선택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들의 재구성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사진 속의 인물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 인물들이 속하는 영역은 사회의 층위이면서 세계의 층위이기도 하다. 또는 그것은 단지 작가가 만들어낸 관념의 대상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사진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배경의 고립으로부터 분리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대상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유령들과 싸우는 동안 작가는 피사체가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할 뿐이다. 사진이 포착하는 진실의 순간은 대상이 스스로의 재현을 자각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순간이다. 물론 그가 자신의 뒤를 돌아본다고 하더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투명한 빛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