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잊어버리기 ―오형근의 미국사진

 

이 영준 <이미지 비평>

 

   오형근이 1989년도부터 1993년까지 미국에서 찍은 사진들을 쭉 훑어보면 한편의 장편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 중에는 컨추리 가수 우디 거스리를 닮은 사람도 있고, 배우 프랭크 시나트라를 닮은 사람도 있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눈에 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독자 여러분들이 사진 속에서 찾아 보시라. 여러분들의 데자뷰적 상상력을 동원하면 더 많은 배우나 가수들을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배경은 미국 오하이오와 켄터키의 시골마을과 루이지애나의 뉴 올리안즈이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괴기할수도 있고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으며, 낯설어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런데 실제의 영화의 주인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 사람들이 왜 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걸까? 사진이 영화 같아 보인다는 것은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혹시 ‘본다’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에 대해 뭔가 소름 끼치는(uncanny) 진실을 드러내 주는 것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진을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진실, 즉 눈앞에 실제로 존재했었던 어떤 사물의 지표적(indexical) 흔적을 기록한다는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오늘날의 이미지 일반을 특징짓는 이론적 수사들, 즉 가상성(virtuality)이니, 하이퍼현실(hyper reality)이니 하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지표적 기록성, 즉 그것이 어떤 외부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게를 가지고 있다. 오형근의 사진을 보면서 그 무게를 조금씩 덜어 보자.

 

    미국의 문화와 관습에 익숙치 않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오형근의 사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틀림없이 낯설어 보일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은 뉴욕의 마천루와 로스 앤젤레스의 베벌리 힐즈, 플로리다의 월트 디즈니 월드 같이 관광적으로 채색된 상투형들을 통해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정작 보통의 미국 사람들이 이런 유명한 장소가 아닌 시골 구석의 삶의 터전에서 어떻게 살고노는지는 한국사람 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미국의 대도시의 중산층 독자들에게도 낯 설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뉴욕 타임즈를 읽고, 메이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거리의 카페에서 와인이나 커피를 마시고, 지방질이 적고 주로 채소로된 헬스풋을 먹는 도시의 삶이 정상적인 것이라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와인보다는 맥주를 마시고, 기름기가 많은 프라이드 치킨을먹는, 그들이 소위 경멸적인 어조로 ‘레드넥 (red neck; 땡볕에서 노동일을 많이 하여 목이 붉게 그을은 시골 사람들을 미국사람 들이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은 타자화(他者化)된 영역이다. 상당한 수준으로 삶이 평준화되어 있는 미국에서조차시골은 도시에 대한 타자인 것이다. 유럽 사람들이 유럽 이외의 영역을 타자로 만들면서 근대적인 주체로 되었듯이, 미국의 도시 사람들도 시골을 타자화 하면서 스스로 미국적 주체가 되었다. 1930년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타자화에 멋지게 성공한 사례이다. 아무도그 이미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타자로 인식하지 않고 ‘공황과 모래폭풍에 시달려 피폐해진 농촌의 진실된 모습’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다큐멘터리 사진의 관객 층은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 사는, 라이프 지를 사 볼 만하고 전시회를 가 볼 만한문화적 습관과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에 찍힌 시골의 허허벌판 한 가운데 사는 대상인물 들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속해 있다.

  

그들 미국의 시골사람 들은 우리에게는 이중으로 타자화 된 영역이다. 사진이라는 도시화된 매체를 통해(작품으로 찍혀지고 갤러리에서 보여지는 사진은 분명히 도시적인 현상이다) 이미지화 될 때 그들은 한번 타자화 되었고, 한국 사람들에게 보여질 때 또 한번 타자화 되었다. 문제는 사람을 이미지화 하면서 그들에게 부여하는 위치이다. 레드넥은 도시사람이 보았을 때 그런 것이고, 그들 스스로는그냥 인간일 뿐이다. 마치 한국에 사는 우리들이 스스로를 황인종으로 인식하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의 일부로 인식하듯이. 문제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다른 체제가 만나는데 서 온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차이가 단순히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극심한 불균형 속에 놓여있다는 점, 즉 한국은 미국에게 꼼짝 못하는 제3세계의 작은 나라이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라는 극심한 불균형은 오형근의 사진 속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진에서는 그런 불균형은 전세계적인 미의 이상이 되어 있는 미국의 배우나 모델의 이미지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문화적 우위의 이름으로 한국사람의 망막에까지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형근에게 사진 찍힌 사람들은 미국의 변방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오형근의 카메라와 플래쉬의 작용에 의해서도 그런 우위를 빼앗겨 버리고 있다. 마치 표백제가 옷감에서 얼룩을 빼 버리듯이.

 

    인물의 정면에서 예외 없이 터지는 플래쉬는 결코 그들을 존엄하고 자랑스럽게 보여 주는 빛은 아니다. 그것은 근대의 규율권력이개발해 온 관찰과 감시의 빛이다. 정면에서 터지는 플래쉬의 불빛은 187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서구에서 자신의 정체성을어두운 곳에 감추고 싶어하는 범죄자, 부랑자, 정신병자와, 그들의 거주지인 슬럼을 행정, 복지, 보건의 밝은 영역, 즉 가시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보인다는 것은 구제 받는 일이다. 즉 행정력의 눈길이 닿는 곳은 개선되고 지원된다. 1920년대 뉴욕의 슬럼은 제이콥 리스에 의해 사진 찍힘으로써 개선되었고, 열악한 상황에서 노동하던 어린 노동자들은 루이스 하인에 의해 사진 찍힘으로써 보호 받게 되었다. 실제로 하인의 사진은 어린이들을 힘들고 열악한 노동에 고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통과되는데 결정적인근거가 되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학교에서 선생님 눈에 띄고 싶어하고, 방송국에서 피디의 눈에 띄고 싶어하고, 작가는 평론가의 눈에 띄고 싶어한다. 그러나 눈에 띈다는 것이 혜택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바로 그 순간에, 보여진다는 것은 규율권력의 통제하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규율권력이 얼마나 보통사람의 수준에까지 세세하게 퍼져 있는가는 범죄인에 대한 미국 영화가 잘 보여 준다. 미국 영화에서는 도망자가 식당이나 가게에 들어갔을 때 마침 그를 수배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그의 얼굴을 알아본 가게주인이 경찰서에 전화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따라서 도망자는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는다. 즉 그는 가시성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동물에게 야행성과 주행성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빛을 좋아하는 타입과 빛을 싫어하는 타입이 있다. 또한 같은 사람이라도 빛의성격에 따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유명 배우라면 자신을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비춰 주는 스튜디오의 조명은 좋아하겠지만 찰거머리처럼 쫓아다니며 사생활의 치욕스러운 부분을 캐내는 파파라치의 플래쉬는 싫어한다. 다이애나를 죽인 것은 파파라치의플래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상을 아름답게 보여 주려는 예술사진은 바로 그런 플래쉬를 피함으로써 예술성을 획득해 왔다. 그래서 예술사진에서는 확산광을 써서 인물이나 대상을 부드럽게 묘사해 왔던 것이다. 예술사진 뿐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찍는 일반적인 초상사진이나 광고사진에서도 부드러운 확산광을 쓴다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의 휴대용 플래쉬에서 빛을 조금이나마확산시켜 주는 반사판이 달려 있다거나, 그것도 안되면 천장에 빛을 반사 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즉, 부드러운 확산광은 사진이규율과 감시의 빛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애쓰는 징표이다.

    그러나 카메라 플래쉬의 의미의 역사는 미국의 사진가 위지(Weegee; 본명 Arthur Felig)와, 다이안 아버스에 와서 그 의미가 반전된다. 플래쉬 불빛이 만들어 내는 바로 그 가시성의 성격, 즉 대상을 아름답고존엄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인물을 무방비 상태에서 노출되고 폭로된 것으로 묘사하는 바로 그 성격이 예술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졌으나, 위지와 아버스의 플래쉬는 정면에서 생경하게 터져서, 바로 그런 식으로 규정되는 예술성에 반발한다. 뉴욕의 밤의 살인사건현장을 찍은 위지의 사진이 예술작품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그는 경찰의 무전교신 내용을 들으며 사건현장을 쫓아가서 사진을찍는 보도사진가 였다. 그의 사진은 경찰서의 범죄감식의 담론 속에 들어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애초부터 예술적인 사진을 찍겠다는 최소한의 동기도 없었다. 그러나 생경한 빛으로 대상의 아우라를 말끔히벗겨 버리는 위지 사진의 시각적 어법은 부드러운 빛을 가지고 아우라가 잔뜩 스며 있는 작업을 하던 기존의 사진의 예술성에 대하여 반대 극에 위치해 있음은 분명하다. 즉, 사진의 예술성에 대한 반발이 사진의 비예술적인 측면에서부터 들어온 것이다. 아버스의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론 아버스는 인물의 심리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과, 사진을 찍을 때의 초현실적인 세팅 때문에 그 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지만, 여기서도 역시 대상인물이 스스로를 연출할 틈을 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빛을 퍼부어 버리는 플래쉬의 빛이 아버스의 인물들을 규정하고 있다. 이때의 플래쉬의 빛은 결코 자비로운 빛은 아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 아무개는 아버스의 인물이 된다. 아버스의 사진을 많이 닮았다는 혐의가 끈질기게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오형근의 사진의 특징이 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플래쉬의 부담스러운 빛이다.

    그러나 오형근의 플래쉬는 대상인물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기보다는 다른 곳에 가져다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형근을 아버스의짐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 그것은 오형근의 버릇과도 관계되는데, 그것은 픽션과 실제를 구분하는 것을 일부러 잊어버리는 버릇이다. 그는 그 이후의 그의 작업에서도 그러했지만, 실제인지 가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진들을 찍은 적이 많다. 예를 들어 그가 광주항쟁에 대한 영화 <꽃잎>의 영화 포스터를 찍을 때가 그러했다. 그는 그 영화에 나오는 엑스트라와 수많은 구경꾼들을 찍었는데, 그 엑스트라는 실제의 엑스트라이긴 하되, 그들이 연기하고 있는 실제의 군인이나 시위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군인이나 시위자를 ‘연기’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실제 상황이다.

 

즉 그들은 정말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구경꾼들은 엑스트라인지 구경꾼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픽션과 실제의 구분을 일부러 잊어버린다는 것은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을 일부러 쓰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한다. 즉 다큐멘터리의 수법을 쓰되 이미지가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오형근이 미국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이 사람이 정말로 그냥 보통사람인지 아니면 영화배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설사 미국의 보통 시골사람인 것이 확실한 경우에도, 그들이 이 사진에 찍히기 위해서 일부러표정을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찍힌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마치 하늘에 UFO가 나타난 듯이 멍하고 놀란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이 정말로 UFO를 보고 있는지, 무슨 폭발 음에 놀라 입이 벌어지고 눈이 멍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불분명성은 그의 사진에서 작동하고 있는 전혀 정돈되지 않은 시선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즉 피사체들은 카메라가 그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시선도 카메라의 렌즈로부터 자유롭다. 또한 카메라의 렌즈도 그 시선을 피사체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눈길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눈길은 작가가 일부러 준 것은 아니다. 오형근이 쓰는 그라플렉스 카메라의 특성상, 파인더의 주변부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카메라는작가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트릭을 부려, 자기가 사진의 프레임에 넣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넣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의프레임은 작가의 시선을 초과하고 있다. 그러나 그라플렉스 카메라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요즘 나오는 카메라는 뷰 파인더에 보이는 이미지의 크기가 필름면에 찍히는 이미지와 같도록 시야률을 100%에 맞추려고 노력을 함으로써 카메라의 프레임이 사진가의 시선을 초과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지만, 광학적인 정확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초과의 문제는 사진의 의미작용에 항상 따라다닌다. 그런데 오형근의 경우에서는 작가의 시선을 초과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우리에게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잘려져 나가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간판, 주인공의 어깨 너머로 얼핏 모습을 드러낸 국외자의 모습, 그들은 대개는 영 딴 곳을 보고 있으며, 자기가 사진을 망쳤다는데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오형근의 사진에서는 그런 망친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해 준다.

  

초등학교 때 미술 시간을 떠 올려 보면 우리들은 누구나 그림을 망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림을 다 그렸는데 결정적으로 구도가 틀렸거나, 사과를 그리려다가 쥐를 그리는 식으로 그려진 사실 자체를 틀리게 묘사했다거나, 아니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망치로’망친’ 어느 사람처럼 그림에 결정적인 손상을 가한 것이 아니라 대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초기에 붓이 한번 잘 못 나갔거나, 물감이 약간 번진 것 등, 사후에 수정 가능한 망침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우리들이 낙담을 하고 도화지를 구겨 버린 것을 생각해 보면, 오형근도 자신의사진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많은 사진들 중 상당수를 ‘망친’ 사진으로 생각하여 필름 자체를 내버린 적이 있다. 여기 실린 사진들 중 이상한 줄무늬가있는 것은 그렇게 내버려졌다가 구제된 사진에 남은 상처들이다. 그렇게 다시 구제된 사진이아니더라도, 이 사진들 중에는 망친 것들이 많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망친 사진만이 아니라, 온전한 사진에서도 의미의 넘쳐 남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것은 작가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런 의미는 대개는 한 장 한 장의 정지된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는 내러티브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가녀린 표정으로 프레임의 바깥을 보고 있다가 카메라에 잡힌, 코너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여자 헌병은, 마치 영화의어떤 줄거리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와중의 어느 등장인물 같기만 하다. 코너라는 짧고 강한 인상의 이름이 왠지 영화의 등장인물 일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는 물론 전형적인 미군들처럼 군기가 잘 들어 있다. 그러나 헌병의 임무를 바삐 수행하고 있는 도중에 헤어진 옛 애인의 모습을 군중 속에서 멀리 얼핏 본 그녀는 과거의 실연의 기억을 떨치지 못한 채 아쉬운 가슴을 접어야 했다. 또한, 무슨 매표소인 듯한 창구의 뒤에서 이 쪽을 보고 있는 모자 쓴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데이븐포트로 가는 마지막 열차는 이미 떠났다오. 내일 다시 오시 구랴. 안된 얘기지만, 이 도시에는 밤을 보낼 곳이 그리 많지 않소. 메인 스트리트 모퉁이에 있는 타미의 바에서 테킬라나 마시는 수 밖에.” 우리의 주인공은 쓸쓸한 표정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역을 빠져 나와 비가 내리는 밤거리로 사라져 간다. 이상하게도 이 아저씨에게 표를 사러오는 사람들은 항상 차를 놓칠 것만 같다.  고지식한 표정의 두 시골농부는 말한다. “그 놈들 우리 마을에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할거야.  또다시 나타났다가는 이 윈체스터가 불을뿜을 줄 알라 구. 콜드웰이 어딘 줄 알구.”  <이지 라이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토바이를타고 가는 잭 니콜슨과 데니스 하퍼를 아무 이유없이 총으로 쏴 버린 사람들이 이들일 것같다.

   어느 중년 부부의 놀라움은 정말 픽션적이다. 그들은 무슨 엄청난 것을 본 것 처럼 눈이토끼 눈 처럼 둥그래졌다. “여보 저기를 봐요. 드디어 화성인들이 우리 앞에 나타났어요. 이를 어쩌면 좋지요? 저 긴 촉수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남편은 말한다. “너무 두려워 말라 구. 그들이 우리의 친구일지도 모른다 구. 지난 53년에 로즈웰에 나타난 우주인들도 우호적이었다 구.” 아니면 그들은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미국생활 들여다 보기에는 다분히 관음증적인 호기심이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오형근이 미국 생활의 한가운데 있는, 앞서 기술한 ‘정상적인’ 미국인이 아니라 국외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이 사진을 찍을 때 그는 오하이오에서 사진을 공부하는 유학생이었고, 학교에 등록해 있다는 것을 빼고는 미국의 문화와 제도, 관습에 전혀 얽매어 있지도 않았고, 그 속에서 그가 끼어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원래 학생이란 것이 보장된 사회적 위치가 없이 떠다니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인데, 오형근은미국에 일시적으로 와 있는 한국의 학생이라는 점에서 그는 이 사진 속에 찍혀진 현실에 대해서는 이중으로 국외자이다. 그런 국외자에게 4×5 필름을 쓰는 그라플렉스 카메라는 그 넓적한 생김새로 말미암아 사진가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에 아주 좋은 은폐 물이었을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은 누구도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서 흔히 말하듯이, 이 사람들이 원래부터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들은 결코 소외되어 있지 않다. 뉴올리안즈의 마디 그라 축제에서 무엇인가에 지치고 허탈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여장의 동성연애자도소외되어 있지 않다. 시골의 어느 술집에서 서로를 측은한 시선으로 보며 껴안고 있는 노 커플도 결코 소외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소외는, 90년대 말 한국의 혼란스러운 문화적 지형 속에서, 그것이 맹목적인 생산적이건, 그에 대한 대안이건,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부유하는 지식인, 예술가, 학생들이 자신의 심경을 대상에 투사(projection)하는 버릇일 뿐이다. 한국에서건 미국에서건 생활인들은 소외되기에는 너무 바쁘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주체생산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주체로 행세하기 바쁘다. 그들이쓸쓸하게 보이는 것은 보는 이의 심정의 투사일 뿐이다. 투사는 아주 나쁜 문화적인 버릇이다. 이 사람들이 사진 속에서 주인공으로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소외되어 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오형근의 사진 찍기 방식 때문이다. 그들은 집에 가서는 가족사진 등을 통해서 나름의 시각적 표상방식을 통해 주인공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재수없게 오형근의 카메라에 걸리는 바람에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쫓긴 것이다. 사진의 한 가운데, 조형적으로는 주인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의미상으로는 주인공이 아닌 이 상태는오형근의 사진이 왜 재미있는지 말해 주는 결정적인 포인트이다. 

    인물을 주인공의 자리에서 박탈해 버리는 오형근의 사진 찍기 방식의 특징은, 몇몇 예외는 있지만 인물의 시선을 정면으로 대하지않고, 마치 그들이 어디로 도망가는 도중이나, 사진 찍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오형근은 카메라의관음증적 시각을 빌려, 시골의 경매나 마디 그라 축제 같은 미국적인 의례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것들이 미국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한국사람에게는 진기한 것으로 보인다는데 이 사진의 초점이 있다. 한국사람 들은 미국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진에 나타나는 미국의 일상은 한국사람 들에게는 전혀 낯 설은 것들이라는 사실이 한국이 미국을 볼 때의 기울어진 시선을 구성하고, 그것은 문화적인 차이를 구성한다. 여기서 기울어진 시선이란, 일상적인 것이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고 뭔가 기이한 것, 낯 설은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시선이다. 즉 우리가 평범한 사물을 볼 때 정면에서 보지 않고 옆에서 삐딱하게 보면 그 사물의형태가 일그러져 보이듯이, 사진 찍은 사람이 한국의 유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 사진을 보는 우리들은 한국의 일상과 문화 속에서 숨쉬고 살아간다는 점이 미국의 일상을 다른 모습으로 보게 만든다. 물론 미국이 한국을 볼 때도 기울어진 시선은 작용한다.

    그런 기울어진 시선은 관찰의 시선도 아니고, 감시의 시선도 아니다. 오형근은 그런 시선을 가지고 인물들을 ‘보고’있다 기 보다는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누구인지, 실제 인물인지, 영화배우인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를 찍고 있는 사람들이 카메라 속의 인물이 실제 인물, 즉 직업인으로서의 배우를 보고 있는지 영화 속 등장인물을 보고 있는지 잊어버리듯이 말이다. 픽션과 실제를 잊어버리는 오형근의 버릇은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나는 그의 고향이 어딘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이태원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태원에서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에게 나의 고향 얘기를 안 했다. 그가 안 믿을 것 같에서다.) 잊어버리는 수준에까지 온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오하이오에서 고향을 찾으려 하고, 낯선 미국사람들의 얼굴에서 고향사람 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는 이제 고향과 타향마저 구분하기를 잊어버린 것이다. 사진은 기억을 대체하는 수단이지만, 오형근의 미국사진에서는 사진은 강제로 잊어버리게 만드는 수단이다. 아니, 수단이라기보다는잊어버리는 ‘자리(site)’이다. 즉 우리는 그 사진들 ‘속’에서 뭔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사진들에서는 그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이름은 무엇이고 직업은 무엇이며 성격은 무엇인가가 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이들 인물들에게는 내면이 없다. 우리가 내면이라고 부를 만한, 차곡차곡 정돈되고 통일되어 있으며 밖(외면)과 구별되며, 언어, 행동, 예술 등을 통하여 밖으로 표출될 수 있는 어떤 것이 그들에게는 없다. 오로지 그들이 연기하는 몫, 역할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내면이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오형근의 사진의 등장인물 들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그들의 연기가 우리들의 데자뷰와 파장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기는 ‘진짜’이다. 영화배우가 하는 연기의 결과로 나온 이미지는 가짜이지만 그의 연기는 진짜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형근의 사진을 통하여 사람을 참으로 순수한, 꾸밈없는 상태에서 볼 수 있다. ‘꾸밈없는’이라는 말은 꾸미지 않은듯이 보이도록 만드는 엄청나게 간사하고 정교한 술수와 전략을 지칭하는 아주 바보 같은 말이지만, 오형근의 사진은 정말로 사람들을 꾸밈없는 상태에서 보여 준다. 사람들이 미처 꾸미기도 전에 플래쉬로 급습해서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급습하는 카메라의 능력을 수잔 손탁은 죽음과 결부시켜 ‘부드러운 살인’이라고 했지만, 대상이 자신을 위장하거나 연출하기 전에 습격하여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사진이 회화, 드로잉, 비디오, 컴퓨터 그래픽 등, 사진보다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우월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모든 시각예술의 형태를 능가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대상에 정면으로 부딪힐 수 없다면 이 세계의 존재를우리는 어디서 확인할 것인가. 산 낙지를 먹기가 두려워 익혀서 양념으로 감싸서 먹듯이, 날 것의(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brute라고 했고, 오형근은 raw라고 했다.) 대상을 두려워하여 심미성, 정서, 감상성이라는 외피로 포장하여 대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것을 마주 대하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롤랑 바르트가 예술사진을 경멸했던 이유도 대상을 마주 대하는 용기와, 그 용기가 좌절될 때 겪는 트라우마보다는, 사물을 포장하는 술수와 코드가 너무나 빤하게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오형근의 사진을 통하여 우리는 사물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오형근의 사진을 언짢아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사진들은 ‘그들’에게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