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갤러리의 숨은 뜻

 

일반적인 믿음에 따르면, 여고생들은 자라서 아줌마가 될 것이다.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생물학자 헤켈의 말대로, 여고생이 자라서 아줌마가 되는 과정은 인류의 발전과정의 한 축소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고생 사진을 모아 만든 여고생 갤러리는 그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여고생의 진화의 한 단면을 보여줄 것이다. 오형근의 사진작업에서는 아줌마 사진이 먼저 전시가 되었으므로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여고생 갤러리가 진화하면 아줌마 갤러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믿음과 정반대로, 여고생은 아무리 자라도 아줌마가 되지 않는다. 여고생과 아줌마는 과(科)가 다를 뿐 더러, 습관, 취향, 행동양식, 세계관이 다른, 전혀 다른 인종이다. 인종의 차이라기보다는 아예 범주적으로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여고생도 자신이 자라서 아줌마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여고생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오형근이 지난번 개인전에 아줌마의 초상사진을 전시했다고 해서 그것을 이번의 여고생 초상과 비교하거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백남준의 작품이 남대문시장에 진열된 건어포와 계통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불성설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여고생은 그 자체로 어떤 다른 인간의 부류와도 섞일 수 없는 독특한 인간이며, 독특한 인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여고생이 아니면서 여고생인 척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여고생은 카테고리를 이루는 하나의 벽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여고생은 남고생과 다르고, 여중생과 다르고, 여선생과 다르고, 아빠와 다르고 엄마와 다르다. 여고생은 많은 차이의 산물이다. 인간들의 과 사이에는 벽이 있다. 여고생의 외모와 특징은 다른 과의 인간들과 그들을 차별화 하여 인간을 단자(monad)로 만들어주는 벽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여고생은 인간의 이름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관습적인 카테고리의 이름이다. 아무리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는 시대라고 해서 쉽사리 그 벽을 넘어서 다른 과의 인간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무리다. 소통이 활발해지는 만큼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려는 욕구도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형근의 사진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그런 벽들 속에 들어 있으면서 여고생을 성형해낸 차이의 파편들을 보자는 것이다.
여고생은 어떻게 여고생이 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여고생은 여고생의 포즈, 복장, 표정, 소품,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어디서 한데 맺혀서 여고생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더러 여고생을 찾으라고 한다면 당신은 여자고등학교나 여고생의 집, 그들이 잘 가는 집이나 PC방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여고생은 그런데 없다. 여고생은 사진 위에 있다. 여기서 사진이란 두 가지 층위의 ‘사건’을 말한다.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진이다. 사진가가 한쪽 눈을 찡긋 감고 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카메라로 찍은 그 사진이다. 이 사진 속에서 여고생은 다분히 여고생답게 표출된다. 오형근 사진에 나온 여고생들 중에는 치맛단을 줄이고 교복 윗도리의 허리를 파는 등 나름대로는 여고생의 틀을 벗어난 여고생′로(A와 A′의 차이다) 모양을 낸 아이들도 있으나, 이들도 여전히 여고생이다.
그런데 이들이 사진에 잡히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뭔가 대단한 일이라는 점에서 사건이기도 하지만 우연의 요소가 많이 끼어 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사건이다. 약 반세기전 옛날에는 사진관에 기념사진 찍으러 가는 것이 큰 이벤트였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사진도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사진가의 카메라 앞에 서게 되고, 셔터가 눌러지는 순간 그런 포즈와 표정을 짓게 되는 것은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가 사진을 흥미롭게 보는 이유는 사건의 우연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형근의 사진 속의 여고생은 ‘여고생’이라는 범주나 스테레오타입으로 일반화될 수 없는 어떤 순간 속에 들어 있다. 그 순간의 우연성,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틀에 가둘 수도 없는 우연성의 당혹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풍크툼(punctum)이라는 말을 붙였다. 사진은 궁극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고생이라고 알고 있는 그것은 오형근의 사진 속에는 없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여고생들이 또 다른 사진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진은 카메라도, 필름도, 노출도 없는 사진이다. 그것은 여고생이 시선 속에서, 혹은 시선 앞에서 스스로를 여고생으로 연기하는 나르시시즘 적이면서도 자기현시적인 태도, 이미지의 결정체이다. 삶의 매순간 속에서 여고생은 스스로를 사진 찍는다. 여고생다운 습관, 취향, 행동양식, 세계관의 결정체가 여고생이라는 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시선 앞에 나설 준비를 항상 하고 있는 한, 여고생은 대기를 채우고 있는 사진의 시선 속에 스스로를 사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여고생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인간은 항상 누군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하고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옷도 제대로 입으려고 하고, 화장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고생은 그런 시선에 대한 의식이 유달리 강하다. 특히 오형근의 사진 속에 나오는 여고생들은 ‘연기’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여고생들이어서 더 그렇다. 그들은 누군가 항상 자신을 사진 찍고 있다는 가정 아래 살아간다. 말하자면 카메라 없는 일반적인 사진의 시선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카메라도 필름도 없는 여고생 사진의 인용, 혹은 차용일 뿐이다. 어차피 사진은 사물의 모방이므로.
물론 모방에는 태도가 따른다. 일반적인 모방이란 없다. 모방은 항상 대상의 특정 국면을 모사하는 것이므로, 카메라를 든 사진가의 태도와 지향성이 특정한 여고생의 사진을 만들어낸다. 오형근이 만들어낸 여고생은 그 특유의 여고생 모방이다. 작가의 특이성이 있다면 그것은 모방의 시선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이 여고생 사진에 ‘오형근의 시선’이라는 이름을 붙여보자. 그 시선의 특징은 여고생이 아줌마와는 절대적인 차이를 가지는 어떤 존재로서 형상화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작용에 있다. 앞서 썼던, 여고생이 자라서 아줌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는 ‘오형근’이라는 독특한 시선 속의 여고생이 일반적인 인간의 유형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시선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지식의 체계 속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은 허공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등 가족과 인간관계로 짜여진 인간의 삶의 매트릭스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에게 속하는 독특한 시선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다. 단지, 잠정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기마자세, 양반자세 같은 일반적인 이름에서부터, 요가에는 바퀴자세, 연꽃자세 등의 이름이 있다. 그러나 오형근의 사진에 나오는 어느 여고생이 다리를 살짝 꼬고 선 자세나, 한쪽 손에는 아이스크림 콘을 들고 또 한 손에는 퓨마가방을 걸친 자세, 혹은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 혹은 팔각형 손거울을 들고 있는 그 자세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것은 당연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세다. 사진이 만들어지는 그 순간 속에서 결정화된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 결정화는 우주에서 단 한번밖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일반적인 지식의 체계 속에 넣을 수 없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어느 철학자가 흐르는 물의 같은 지점에 두 번 손을 담글 수 없다고 했듯이, 우연한 순간은 결코 되풀이 될 수도, 체계로 들어올 수도 없다. 그 규모와 정도를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사진의 우연 속에서, 한사람 한사람이 개별적이고 특수한 존재인 그들은 ‘여고생’으로서 포획되어 일반화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다.
여고생은 사진 속에 박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유동하는 우연을 얼려서 보존하려는 사진의 욕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진으로부터 걸어 나온다. 그것은 우리가 사진의 유령으로부터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다. 롤랑 바르트가 강조했듯이 사진의 본질은 죽음에 있지만, 우리가 사진을 통해 궁극적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까닭은 사진으로부터 걸어 나오기 때문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걸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여고생들의 연기, 마스크, 응시, 혹은 물음표를 던지는 듯한 표정은 그들이 살아 있다는 징표다. 그러므로 여고생 갤러리는 미국에서 범죄자들의 사진을 모아 놓은 것을 부르던 ‘도둑놈의 갤러리(rogue’s gallery)’와는 전혀 다르다. 도둑놈의 갤러리는 그들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잡아 없애야 하는 범죄자로 보는 한에서 그들을 지식의 요소로 바꾸고 있는 반면, 여고생 갤러리의 여고생들은 쉽사리 지식의 대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어떤 스테레오타입을 부여하려는 순간 그들은 손에 쥐고 있는 거울을 감추거나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거나 꼰 다리를 풀어버릴 것이고 머리카락은 걷잡을 수 없이 휘날릴 것이다. 지식이 아니어도 좋고 체계 속으로 안 들어와도 좋고 파악되지 않아도 좋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 않은가. 결국 우리가 사진에서 찾는 것은 죽어 있는 위대한 모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작은 것들이 아닐까?
그 작은 것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오형근이 그 많은 여고생들을 사진 찍어서 그렇게 크게 프린트하여 전시라는 스펙타클을 만들어 놓은 데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극소량의 플루토늄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엄청난 시설이 필요한 것과 같다. 엄청난 규모의 축구장에 엄청나게 많은 관객이 모여 있어도 핵심은 그 작은 공이 아주 작은 공간을 뚫고 골에 들어가는 것이듯, 오형근이 벌여 놓은 여고생 갤러리의 핵심은 어딘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여고생의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손거울과 운동화에 낀 때를 잘 보자.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우연이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놓치고 마는. 그들은 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우연이고 사건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뿐더러, 거꾸로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도 그런 관객 중의 하나가 될 것인가.

이영준 <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