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초대석
오 형 근
진 동 선(사진평론가)
작가 초대석의 초대 손님은 “아줌마“사진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사진가 오형근 이다. 사진계와 미술계에서 동시에 평가 받고 있는 그에 대해 어떤 화랑 관계자는 `21세기에 가장 주목 받을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고, 또 그런 말이 사실인지는 곧 전개될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이르러 우리가 지켜보고 평가해야 할 일이나 이 시점에서 그런 말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또 그런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부쩍 사진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미술계 일각과 화랑 관계자들의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사진활동을 가장 활발히 했던 사진가의 한 사람이고, 작품에 대해서도 안팎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아마 그러한 요소들이 큰 작용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작가 오형근 에게는 여러 가지 강점이 있다.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탄탄한 사진적 테크닉, 그리고 풍부한 실전 경험이 그의 작품의 격을 높이고 있다. 특히 전문 수준에 이르는 영화 이론과 특출한 연출능력이 사진에 접목되어 예술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고양시키고 있다. 그의 작품 “불확실한 존재“, “이태원 사람들“, “광주“, “아줌마“는 바로 그러한 이론과 연출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진들이다. 그가 주목 받는 것도, 그리고 이 자리에 초대한 것도 그의 사진적 역량과 작가정신 때문이다.
그는 30대 중반의 사진가이다. 사진, 영화, 미술에 있어 탄탄한 이론과 실기 능력을 겸비한 그가 다가오는 21세기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또 어떤 각오로 작업에 임할 것인지를 그의 사진세계와 더불어 알아보고자 한다.
진동선(이하 진): 전시 준비로 바쁘실 텐데 작가 초대석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에 앞서 오형근 씨의 주요 이력을 독자들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혹시 정정할 곳이 있으면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오형근 씨는 1963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88년에 브룩스 사진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92년에 오하이오 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1991년에 오하이오 시그프레드 갤러리에서 「Uncertain Presence」가 있었고, 1993년에 최 갤러리에서 「오형근. 사진.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1999년 3월,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아줌마」 전시가 있을 예정입니다. 주요 그룹전으로는, 1992년에 「한국사진의 수평전」이 있었고, 1993년에 「자아와 전체의 접전」이 있었으며, 1994년에 「한국 현대 사진의 흐름전」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가진 주요 그룹전으로서 1997년에 「생활의 발견전」, 1998년에 「한국 사진 역사전」이 있습니다. 이밖에 국제전으로는 1996년에 동경도 사진 미술관에서의 「격동기의 아시아전」을 필두로, 1998년에 「타이페이 비엔날레」와 시카고 현대사진 미술관의 「이화와 동화전」이 있었습니다. 1997년 이후로 눈부신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정할 곳은 없는지요.
오형근(이하 오): 네. 없습니다.
진: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오형근 씨는 사진과 영화를 동시에 공부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실제로 작품에 그 두 가지 요소가 내재해 있고요. 우리 사진계 에서는 흔치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영화와 사진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였고, 또 그 비중은 어느 것이 더 큰가요.
오: 사진보다 영화가 먼저였습니다. 유학가기 전만 해도 사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그때 제가 아는 막연한 사진은 아주 지루한 것이었어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광적일 정도로요. 거의 매주 교실 뒤에 그 주의 영화평까지 써 놓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어른들의 8mm 영화 동호회에 가입 했었지요. 지금은 물론 영화보다는 사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별로 구분을 두지 않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새로운 사진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하고 사진 작업 중에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요. 아무튼 두 매체 다 관찰과 호기심을 요하니까 저한테는 상호 보완 적입니다. 어쨌든 영화가 제 인생에 있어서는 시각영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사진은 정말 몰랐고 단지 영화에 비하면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 중.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지를 알았다는 이야기인데, 사진은 어떻게 지루하다고 생각했습니까.
오: 그때 제 머리 속에 사진은 빵떡모자와 파이프, 그리고 사진관이었어요. 또 사진하면 누드나 바위가 먼저 생각났기 때문에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에 비하면 영화는 아주 환상적이고 매력적이었어요.
진: 그렇다면 유학을 가서 어떤 계기로 사진을 먼저 공부하게 되었습니까.
오: 영화를 먼저 공부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하길중 감독을 무척 좋아했어요. 언젠가 어떤 잡지에서 그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UCLA를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가면 하길중 감독이 나온 UCLA로 갈려고 생각했고, 여기에 몇 가지 상황이 결부되어 캘리포니아 UCLA에 어플라이를 했습니다. 조건부 입학을 하여 공부를 했는데 정식 입학이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영화학과가 워낙 인기 있던 터라 정식으로 입학하기 위해서는 미국학생들과 똑같은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제가 입학하기에는 1년 이상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일단 어학실력을 쌓자 해서 사설 랭귀지 스쿨을 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인근 다른 영화학과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 도서관에서 제가 찾아낸 영화학과는 알파벳 A에서 아트센터, B에서 브룩스 사진대학이었는데 브룩스에서 먼저 입학 허가서를 보내왔더군요. 그래서 사진대학인 브룩스에 사진이 아닌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진: 그랬군요. 브룩스 사진대학에 영화과가 있었는지 미쳐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영화에서 사진으로 전공을 바꾸게 됐습니까.
오: 우연하게 이루어 졌어요. 브룩스 사진대학은 교과과정이 로우 디비전(Low Division)과 어퍼 디비전(Upper Division)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사진대학인 만큼 모든 학생들이 입학을 하면 전공에 관계없이 로우 디비전에서 사진을 필수로 들어야 하고 거기에다가 반드시4X5 대형 카메라를 의무적으로 사야 했습니다. “난 영화 공부하러 왔는데…”하는 생각에 잠시 고민도 했지만 이런 과정도 필요 하겠지 하고 사진 공부를 시작 했습니다. 정말 재미없이 거의 억지로 사진을 하다시피 했습니다. 매일 하는 일이라곤 필름 테스트와 조명 뿐이였기 때문에 정말 지겨웠어요. 하길종 감독이라는 예술가적이고 감상적인 삶을 생각하다가 사진 메커니즘이라는 복병을 만나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었죠. 사진과목을 이수해야만 제가 공부하고 싶은 모션 픽쳐, 즉 영화제작 클래스를 들을 수 있었거든요. 결국 학점을 따고 모션 픽쳐 클래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그만 첫 클레스부터 동료 학생과 사소한 다툼이 있었습니다.사건이 커져서 한 학기를 쉬어야 했는데 결국 이 일로 영화에서 사진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경우는 마음에 맞지 않아도 공동제작을 할 수밖에 없지만 사진은 혼자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분간이라고 생각했고 여러 사람들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혼자서 하는 사진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이때부터 마음을 고쳐먹고 사진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안셀 아담스가 저의 우상이었고 때문에 존 시스템에 빠져 풍경사진을 했습니다. 아리조나, 유타, 네바다 등지의 사막을 여행하면서 풍경을 찍는 일이 제겐 최대 즐거움이었습니다.
진: 그렇게 된 것이군요. 그렇다면 브룩스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대학원으로 진학하셨는데 거기에서는 어느 것이 먼저였습니까?
오: 거기에서도 사진이 먼저였습니다. 사진으로 석사학위를 먼저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까 갈등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공부하려고 미국에 왔는데 영화공부를 못하고 간다는 것이 아쉬웠죠. 조금이라도 영화를 공부해야지 생각해서 다른 학교를 물색하던 중에 다행히 영화과 대학원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 해주어서 영화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진: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것이 언제입니까.
오: 1993년 여름이었습니다.
진: 저는 오형근 씨의 사진을 1992년 겨울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있었던 “수평전” 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오형근 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1993년 최 갤러리에서 있었던 개인전은 귀국하자마자 바로 가진 것이군요.
오: 네.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돌아오자마자 전시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전시한 사진은 “불확실한 존재(Uncertain Presence)”였고요. 그 사진들은 제 대학원 졸업 작품이기도 했고, 89년부터 92년까지 약 4년간 작업했습니다.
진: 뉴욕 미드타운 Y 갤러리에서 전시한 사진이 그 사진이었군요. Y 갤러리 그룹전은 어떻게 참가하시게 되었습니까.
오: Y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진 선생님도 아시는 사진평론가 A.D. 콜만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의 책 『Light Reading』을 보면 Y 갤러리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전 이 화랑이 대단한 화랑인줄 알고 뉴욕에 가면 이 화랑을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Y 갤러리는SVA 사진학과에서 강의를 했던 마이클 스파노Michael Spano가 큐레이터로 있는 화랑이었는데 막상 찾아가 보니 무척 소박한 공간이었어요. 주로 신에 작가들의 작품들만 전시하는 굉장히 허름한 화랑이지요. 다만 중요한 건 A.D. 콜만이 가끔 전시평을 써 준다는 점 이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몇 달 후, 마이클 스파노가 그룹전에 참여시켜 주었습니다.한 3주정도 전시를 했는데 그때 매일 뉴욕 타임즈를 사보았던 기억이 나요.혹시 A.D. 콜만이 내 사진에 대한 글을 써 주지 않나 하는 기대감에서요. 그러나 그로부터는 사진평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제 사진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었어요. Y 갤러리 말고도 로렌스 밀러, 제임스 댄지거, OK 해리스, MOMA 등 유명 화랑을 찾아 다녔습니다. 제 포트폴리오를 한번 봐 달라고요. 대개는 미리 약속을 해야 사진을 보여 줄 수 있는 곳들이었는데 무조건 들어가서 사진들을 펼쳐 놓곤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히 엉뚱한 열정이었습니다. 물론 당장 전시를 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반응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일은 OK 해리스 큐레이터의 말 이에요. “네가 이 사진들을 20년 전에만 들고 왔어도 굉장히 성공을 했을텐데… 안됐다.”라구요. 물론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말이지만 아마도 유행이 지난 작품이라는 말이었겠지요. 하지만 정확한 얘기지요. 왜냐하면 그 작품들은 내가 아버스나 위노 그랜드에 빠져 있을 때 찍은 것들 이니까요. 어쨌든 “불확실한 존재“는 지금도 애착이 가는 사진이에요. 정말 열심히 작업했습니다. 언젠가는 책으로 내보고 싶습니다.
진: 사실입니다. 저도 “불확실한 존재“에서 작가의 애정, 열정, 그리고 작가의 독특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한국에 없었기 때문에 최 갤러리 전시를 보지 못했습니다만. 전시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오: 일주일간 전시를 했는데 의례적인 방문객들을 제외하곤 총 37명이 다녀갔습니다.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언젠가 진 선생님께 얘기했던 것 같은데, 더욱 악몽이었던 것은 그들의 반응이었어요. 제 사진들을 보고 던지는 유일한 질문은 “혹시 다이안 아버스를 아세요?” 아니면 “이 팜플렛 그냥 가져가도 되요?” 였거든요. 정말 최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악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제가 사진과 학생이나 사진가에게 말하는 대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시선이 카메라로 향하고 플레쉬를 쓰면 아버스 사진, 같은 사진인데 자연광에 배경이 희면 아베돈 사진, 그리고 남자 누드를 찍으면 무조건 매이플소프 사진이라고 한다고 말이예요.
진: 그런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죠. 그러나 분명 오형근 씨 사진은 아버스 사진과 유사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관객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본인의 생각은 어떠세요.
오: 배웠죠. 하지만 같다는 것과 배웠다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영향을 받았지요. 정말 아버스 책이 걸레가 될 정도로 보았고 물론 지금도 일종의 성경처럼 보고 있죠. 그녀는 굉장히 영화적인 캐스팅을 구사해요. 아버스 이전에는 다큐멘터리에서의 캐스팅을 몰랐어요. 그냥 우연과 필연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캐스팅이 있겠구나 했지요. 그리고 `반사‘요! 그것도 아주 유치하고 싸구려 같은 `반사‘ 말 입니다. 아버스의 플레쉬는 물리적으로 인물을 고립시키고 격리 시키기도 하지만 싸구려 `반사‘는 역설적인 슬픔을 더해 준다고 느꼈어요. 이런 것들이 아마도 “불확실한 존재“에 나타나고 또 “이태원 사람들“, “광주“, “아줌마” 사진에도 나타나겠지요.
진: 텍스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가령 모델들을 선정하는 케스팅과 사진 제목으로서의 독특한 텍스트 말입니다. 이를테면 “몸에 문신을 한 남자” 라든지, “얼굴에 점이 있는 푸에르트리코 여인“과 같은 독특한 제목의 텍스트가 “아줌마” 사진에서 “꽃 브로우치를 한 아줌마” 라든지 “팔짱을 낀 아줌마“와 같은 텍스트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오: 그렇습니다. 꽃 브로우치나 팔짱은 사진안에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일상이지만 제목에서 지시하면 특별한 상으로 만들 수 있어요. 일종의 강요에요. 하지만 최 갤러리 전시에서 관객들이 말한 아버스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였어요. 전혀 다른 측면이었기에 제가 악몽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정확히 집어내지 못한 채 제 사진을 아버스 사진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다른 결이 있고, 다른 캐릭터가 있는데 사람들은 한 결로만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에 솔직히 속이 상했고 실망도 했습니다.
진: 그렇다면 관객들에게 아버스 사진과 같다고 느낌을 주는 그 사진의 `전면성‘과 후레쉬에 의한 `반사‘에 대해서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카메라를 향하는 전면성, 즉 인물의 파사드에 있어 아버스 사진과 유사점이 많습니다. 아버스의 전면성과 오형근 씨의 전면성에 어떠한 차이점이 있으며, 덧붙여 그 전면성이 “불확실한 존재“, “이태원 이야기“, “아줌마” 사진에는 또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오: 먼저 전면성에 대해 말한다면 아버스 사진의 전면성이 제 사진보다 훨씬 더 `날것‘입니다. 영어에는 날것이란 뜻의 라는 적당한 단어가 있는데 우리말로는 어떤 단어가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새벽녘에 보는 날 생선처럼 요리되지 않고 거친 느낌, 그런 것 아닐까요? 아버스 사진의 전면성은 제 사진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날 것입니다. 아주 거칠고 날카롭고 날것 같은 전면성이죠. 그에 비하면 저의 전면성은 머리를 많이 쓰고 조종도 많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의 `캐스팅‘과 `반사‘가 아버스의 것보다 더 감상적이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디테일한 차이는 혹시 제 사진들의 특징을 질문하시면 그때 이야기 하지요. 사실`반사‘는 저의 사진에 중요한 요소 이지만 정확히 전달하기가 힘들어요. 예를 들어, `93년도에 워커힐 미술관에서 신 카나리아, 트위스트 김의 사진과 함께 `배우 이야기‘를 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잊혀져 가는 연예인의 모습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로만 받아 들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제 사진이 가지는 다큐멘트적인 기록성이나 서사도 중요했지만, 나는 관객들이 롤지에 프린트된 제 사진에서 사진적인 `반사‘라는 특이성을 보아주기를 원했었죠. 그들의 피부와 옷 그리고 알루미늄 샷시와 페인트가 칠해진 벽 위에 스며든 반사요! 그러나 조금도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고 거기에다가 유리 액자 때문에 반사를 제대로 볼 수 없었을지 몰라요. 사진 배경이 어둡기도 했고요.그 후 서울 선재에서 “싹“이라는 전시가 있었는데 그때 다시 신 카나리아 여사 사진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물론 유리를 대지 않고요.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아무래도 반사를 한번 더 시도해보자 하고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아줌마” 사진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진: 반사 얘기를 하셨는데 저는 “불확실한 존재“에서부터 분명한 반사를 보았습니다. 그 얘기를「사진예술」에 쓰기도 했는데, 그러나 아버스 오리지널 프린트를 보지 못하고 작품집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보았던 사람들은 그 반사에 대해서 깊게 인식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아버스가 후레쉬를 사용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녀가 왜 후레쉬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형근 씨의 사진이 아버스 사진과 유사하다고는 생각해도 그 반사까지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저는 봅니다. 물론 반사의 정도도 달랐고요. 사실 아버스의 반사는 전체적이지만 오형근씨의 반사는 부분적인 반사가 아닙니까.
오: 그렇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직접 물어보지 않아 자신할 수는 없지만 아버스의 반사도 극히 부분적인 면에 민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녀가 피부의 번들거림이라든지, 혹은 베니어로 되어 있는 벽이나, 침대의 프레임, 그리고 유리 위에 일어나는 반사를 민감하게 여기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 이전에 이미 반사에 대한 선입관을 가졌던 것으로 저는 봅니다. 한마디로 반사는 사진을 싸구려로 만들고 그래서 싸구려 같은 삶을 더 싸구려로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조롱의 의미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반사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겠지만 이제 그만 했으면 합니다.
진: 아버스 사진의 특징을 말했는데, 그건 좀 다른 경우가 아닌가요. 가령 실내에서 아버스가 후레쉬를 터트린 것은 뒤에 그림자를 통해서 방금 말씀하신 “싸구려 같은 삶을 더 싸구려처럼 보여주는” 현실감으로서 싸구려에 대한 대중들의 선입관을 역이용하는 거지만 그러나 오형근씨의 경우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 이제 캐스팅에 대해서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맨 먼저 흘러간 배우, 연예인들을 찍으셨는데 미국에서 “불확실한 존재“를 찍었을 때와 비교한다면 어떠한 캐스팅의 차이가 있을까요. 서로 다른 공간,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한 인식이 달랐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오: 많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어짜피 그 시발점은 소외이니까요. 두 인물군 모두 소외감에서 오는 정서적인 흔들림을 보여 준다고 봅니다. 다만 인물의 전면성, 그러니까 파사드Facade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존재‘의 인물들은 저와 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있어서 저는 그저 우연히 만난 동양인이었을 뿐 이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제가 필리핀이나 일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큰 카메라, 큰 후레쉬 들고 있었기 때문에 찍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제 카메라 앞에 서기만 하면 자의식이 무너져요. 결국은 카메라를 무서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인물군들을 찾다 보니까 원로 배우나 연예인들을 생각 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 분들이 내세우는 전면성은 소외를 숨기려고 하는 방어벽이 무척 두꺼워요. 거의 자기 최면의 수준이에요. 일례로 내가 이분들께 촬영 의뢰를 드리면서 한 번도 기자라고 이야기 한적이 없지만 지금도 이 분들 중 대부분은 내가 사진 기자였다고 여기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진: 혹시 흘러간 배우, 연예인들을 캐스팅 한 데는 진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가령, 그들이 작가에게 각인된 특별한 그 무엇으로서 말입니다.
오: 맞습니다. 이 분들만큼 얼굴에 삶의 굴곡이나 혹은 자의식의 명암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는 분들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찍은 분들은 신 카나리아 여사, 트위스트 킴, 그리고 추석양, 박노식씨등 주로 원로 배우분들 이었는데 원래는 위키 리,남보원, 쓰리 보이 신선삼같이 `미제와 한제‘가 혼혈처럼 중첩된 분들을 찍으려고 했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어렸을 때 이런 분들을 이태원에서 보고 자랐습니다.
진: 마치 영화적인, 연극적인 내러티브와 캐스팅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지어 일전에 저와 얘기를 나눴던 `소외성‘을 다시 한번 거론해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형근씨 그 같은 내러티브의 키워드를 `게스투스 혹은 푼크툼적인 소외‘라고 했습니다. 박찬경 씨의 경우는 `아웃사이더의 이중 시선‘이라고 한 바 있고요. 이에 대해서 작가 자신은 `교차점에 있는 갈등구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비슷한 키워드 같지만 약간씩 바라보는 시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박찬경 씨의 경우 `아웃사이더는 누구인가‘의 문제, 그리고 `이중 시선‘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작가 자신이나 인물이 아웃사이더로서 갈등구조를 갖고 있다는 뜻이겠죠. 저의 경우는 `부분적인 소외성의 인식‘입니다. 특히 부분적인 형상을 통한 존재들의 소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늘 중심에서 배제된 주변부적인 소외성을 뜻하는 것이죠.
오: 그래요.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전적으로 소외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스 사진이 그러하듯이 완전한 소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너무 즉각적으로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죠. 단정 짖는 거에요. 그래서 시카고에서 있었던 “이화와 동화“라는 전시 제목은 발상부터가 몹시 싫었어요. 이분법은 아주 위험한 구도거든요. 그러나 굳이 제 사진이 소외와 동화 속에 있다면 `소외‘ 당했으면서도 부단히 `동화‘하려는 교차점을 말하고 싶어요.
진: 물론입니다. 소외만을 전적으로 다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 제가 신문을 한 장 가져온 게 있습니다. 탤런트 김혜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마요네즈“에 대한 신문 기사인데, 전원일기 엄마와 마요네즈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전원일기의 희생적인 엄마의 모습과 마요네즈의 자기 삶을 이끄는 도시적인 엄마의 이중성을 말하는 것인데, 결국은 탈출을 꿈꾸는 오늘의 `엄마론‘입니다. 소외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죠.
오: 맞아요. 소외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애매한 게 좋습니다. 즉각적인 내러티브 보다는 모호하고 뭔가 혼선이 되어 있는 내러티브가 저에겐 더 재밌어요. 그렇다고 다중 혼선이지 않은, 딱 두 가지 정도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혼선이 재미있습니다. 결국 단선적이지 않은 갈등구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정서적인 흔들림을 잡고 싶은 거죠. 이런 흔들림이 단순한 구도의 내 사진을 확장시켜준다고 봅니다.
진: 역시 영화적인 방식이군요. 사진의 형식을 띤 영화. 그렇다면 오형근씨 사진에서는 사진적인 요소와 영화적인 요소가 어떻게 자리잡고 또 역할분담을 하고 있습니까.
오: 요즘 사진은 영화가 아니고 사진입니다. 그러나 “불확실한 존재“는 영화적인 요소가 많았어요. 사진을 하면서도 머리에서 영화를 떠나 보낸 적이 없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찍으면서도 영화라고 생각하고 다가갔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와서 “이태원 이야기“, “광주“, “아줌마“를 찍으면서 점차 사진으로 돌아온 거죠. “아줌마” 사진의 경우는 전적으로 사진입니다. 그러나 찍을 때는 자연스럽게 영화적인 요소가 아직은 개입을 합니다. 저의 컨셉을 사진으로 표현하려면 어느 정도 조종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카메라 뒤에서 아직은 조종을 하고 있습니다. 인물들이 제 의도한 만큼 갈등구조를 표현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 저와 생각이 다른 것은 이런 점인 것 같습니다. 사진의 갈등구조는 사진의 기표들에 의해서 그것이 이데올로기, 욕망의 기의로서 생산될 때 종국에 가서 갈등으로 인식된다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저는 오형근씨의 사진을 볼 때마다 사진의 전체보다는 푼크툼, 즉 부분을 더 중요시하고 또 그 부분 속에서 소외성을 읽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국에 가서 작가의 의도대로 부단히 동화하려고 하나 결국 동화할 수 없는 인물들의 갈등, 즉 교차점에 서성이는 인물의 갈등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관객에게 요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 물론입니다. 저도 관객이 `소외된 배우를 찍었구나‘, `우리시대에 소외된 아줌마를 찍었구나‘ 하는 단정적인 시선을 갖지 않았으면 합니다. 짐짓 소외를 가리고 동화하려는 교차점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갈등이 오히려 소외보다 더 큰 슬픔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사실 완전한 소외는 별로 갈등이 없다고 봐요..어쩌면 아줌마들의 두터운 화장이나 진주 목걸이 그리고 반짝이는 장신구들도 소외를 감추려는 푼크툼으로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진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런 것들을 전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진: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래서 사진 읽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오: 저는 이분법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진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에게 종종 이야기하는데 `구심적인‘ 사진과 `원심적인‘ 사진이 있습니다. 즉 어떤 사진은 휙하고 안으로 끌어 당깁니다. 반면에 어떤 사진은, 시점은 물론 생각까지도 뭉게뭉게 퍼뜨려 놓지요. 저는 구심적인 면과 원심적인 면이 애매하게 교차된 사진을 좋아합니다. 아버스 사진이 그 대표적인 경우 일 텐데 그녀의 사진은 처음 보았을 때 누구나 휙하고 빨려들어 갑니다. 물론 게이니 트랜스니 하는 표면적인 화사드는 쉽게 보이죠. 그런데, 들어가서 보면 내용이 바로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호함에 당황하는 겁니다. 찍혀진 모델들을 보면 누구를 찍었고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갈등을 이야기하는데 그 갈등이 사진에 곧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렇게 내적으로 원심력을 가진 사진을 좋아하고, 또 원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제 삶의 무게가 가볍다는 뜻이겠죠. 아버스에 비하면 제 사진의 갈등은 너무 선명합니다. 저는 그게 콤플렉스입니다. 사진가에게 있어서 삶의 무게와 사진의 무게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삶의 무게만큼 사진이 나온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저는 왜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좋아 해주면 기분이 좋은지 알 것 같아요. 아마 자신의 삶이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진: 방금 한 말을 들어보면 오형근 씨의 삶이 자신의 사진에 내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형근씨 삶의 갈등이 사진 속 인물들의 갈등으로 전환된 것으로서, 곧 교차점에서 서성거리는 아웃사이더의 주체가 작가 자신이라는 뜻인지요.
오: 그럴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찍었던 “불확실한 존재“의 경우를 말하면 그것이 저에게는 단순한 미국의 아웃사이더들의 초상이 아니었어요. 예를 들자면 축제에 갔을 때 동양인이고 외부인인 저는 당연히 아웃사이더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저처럼 외국인이 아닌데도 아웃사이더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재미있었던 것은 그 사람들이 아웃사이더임에도 불구하고 차림새와 행동은 주류 영화의 아웃사이더를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라비스 빅클을 흉내내요. 주류와 비주류의 교차점, 비주류이면서 주류의 형태를 흉내내는 갈등 말입니다. 결국 이것들이 저의 갈등이기도 해요. 나는6살 때부터 이태원에 살았고 코카콜라와 칠성사이다가 혼합된 `문화적 혼혈아‘에요. 90년도 “불확실한 존재“라는 작업을 할 당시에 나는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교차점에 있었고, 사진과 영화 사이에 있었고,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헤매는 아웃사이더 였어요. 그래서 아웃 사이더를 볼 수 있었어요.
진: 그렇다면 이에 대해서 몇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오형근씨가 주류 문화에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도 비주류 문화적이라거나, 혹은 혼혈 문화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정해도 좋습니다만 오형근씨는 풍족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비교적 삶이 여유로운 작가로서 알려졌습니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특정 사진의 경우는 의혹의 시선도 있었습니다. 오형근씨의 삶이 사진에 투영되었다면 “이태원 사람들“과 “아줌마” 사진의 경우는 어떠한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는 겁니까.
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군요. 제가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것은 맞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의 집은 이태원에서 커다란 미군 빠를 했습니다. 지금 제 작업실이 이태원에 있지만 그곳의 웬만한 술집 주인들, 지배인들은 저와 어렸을 때 딱지치기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미군 빠를 했기 때문에 미군들과 친했고 실제로 그들이 저를 무척 귀여워 해주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쵸콜렛과 오렌지를 무척 많이 먹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미8군에서 영화도 많이 봤고 내가 미국인이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부유층의 자녀들만 다닌다는 유명한 사립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태원에 산다는 것이 콤플렉스였습니다. 콤플렉스가 얼마나 컸는가 하면 스쿨버스를 타면 집까지 않 가고 서울역에서 내렸고, 그곳에서 78번 버스를 타고 이태원까지 와서 다시 집까지 걸어올라 갔습니다. 이때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저의 집은 이태원에서도 `적선지대‘라고 말해지는 곳, 미성년자들은 10시 이후에 들어오지 못하는 우범지대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태원이라는 동네는 굉장히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교수 아들, 변호사 아들하고 지내다가 집에 돌아오면 술집 아들, 포주 아들들하고 어울려 놀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랬는데, 아무래도 이런 경험들이 “불확실한 존재“와 “이태원 이야기” 사진에 스며들어 있겠지요.
진: 그랬군요.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묻겠습니다. “불확실한 존재“와 “이태원 사람들“에 있어 작가가 강조했던 모델들의 갈등구조, 즉 교차점에 있는 아웃사이더들의 갈등구조가 곧 그들의 혼혈문화 이야기라는 데 충분한 이해가 갑니다. “아줌마” 사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아줌마의 실체는 무엇인지…
오: 진 선생님께서 머뭇거리는 이유를 압니다. “아줌마” 사진은 저의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도 되요.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제가 다녔던 사립 초등학교는 교수 아들, 변호사 아들 등 부유층, 식자층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별별 학부모 모임이 많았어요. 물론 저의 어머님도 이런 모임에 열심히 다니셨구요. 어렸기 때문에 내면적인 것은 잘 몰랐지만 저는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실 때 반짝거리는 옷을 안 입고 왔으면, 반짝이는 금테안경을 안 쓰고 왔으면, 또 파마머리에 잠자리테 선글라스를 안 쓰고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친구 어머니들은 멋있는 니트, 털스웨터, 버버리 코트를 입고 오시는데 저의 어머니는 항상 `쨍‘하게 튀는 분홍색 투피스에 진한 립스틱, 진한 화장을 하고 학교에 오셨거든요.
진: 충분히 이해가 되는군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아줌마” 사진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된 것 같습니다. 가령 TV 드라마에 나오는 강부자, 사미자, 여운계와 같다거나, 경찰청 사람들에 등장하는 일수 아줌마, 복부인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와 같다거나, 심지어는 청담동, 압구정동에 사는 아줌마 같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말이 왜 나오게 되었을까요.
오: 당연한 이야기들이지요. 사미자, 강부자, 여운계는 이미 사회에 아이콘적인 인물들이에요. 그들이 저의 실질적인 어머니가 아니고 TV 속에서 가공된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저의 어머니와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나한테 시어머니고 엄마고 이모고 고모에요. 모두 아줌마죠. 내 사진 속의 아줌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줌마의 아이콘이지요. 이해가 되세요?
진: 물론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해의 차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령 관객들이 아줌마 사진을 볼 때 무엇을 보고 또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게 될까요.
오: 사실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제가 관객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 사진에서 아줌마의 갈등을 읽고 그것이 슬픈 이야기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진: 그러나 관객들이 아줌마 사진에서 그런 슬픔을 경험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오형근씨의 사진은 관객이 볼 때는 통속적인 슬픔을 주는 사진이 아니거든요.
오: 저는 제 사진의 아줌마들을 통속적으로 보거든요. 관객이 그렇게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는 관점은 분명 통속적입니다.
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굉장히 특수한 통속성일 것입니다. 사진 속의 아줌마들은 아주 특별하게 보이거든요. 그러나 관객들은 그것이 특수한 통속성일지라도 슬픔을 느끼기 어렵지 않을까요.
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언젠가 서남 미술관에서 아줌마 사진을 처음 전시했을 때 방명록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어요. `한국에서 아줌마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인 것 같군요‘ 아마도 그 글을 쓴 분은 제 사진에서 어떤 코드를 찾은 것 같아요. 우리가 이야기했던 전원일기 아줌마와 마요네즈 아줌마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전원일기 아줌마보다 마요네즈 아줌마가 더 슬프죠. 가령 전원일기 아줌마들의 된장 냄새는 바로 드러난 슬픔이라고 보면 마요네즈 아줌마의 밋밋한 냄새는 바로 드러나지 않는 슬픔일 수 있습니다. 마요네즈 속에 섞여 있는 계란이며, 식초며, 그런 어떤 부조화된 배합이 더 슬프다는 것이죠. 내 사진의 대부분의 아줌마들은 마요네즈과에요.
진: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화제를 잠시 돌려보겠습니다. 오형근씨 사진은 굉장히 정통적이고 오히려 일반 사진보다 더욱 사진적 요소가 강한 사진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시겠습니까.
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사진적인 요소에 끌립니다. 질문의 요지가 흔히 영화를 좋아하면 영화적인 요소, 그러니까 내러티브에 집착할 것 같은데 어떻게 사진적인 요소들에 집착하느냐는 것이죠?
진: 그렇습니다. 혹시 아버스 영향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오: 그렇죠. 아버스 영향이 큽니다. 특히 그녀가 보여 주었던 사진적인 가시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진평론가 이영준씨와도 가시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무언가 잠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하거나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사진적인 가시성이라고요. 저는 이와 같은 가시성이 좋기 때문에 제 사진에도 그러한 요소들을 적용됐으면 합니다.
진: 가시성이라고 하면 일종의 인덱스로서 지표성을 말하는 것인가요.
오: 그렇죠. 창이든 거울이든 프레임을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가시성보다는 영화적인 내러티브, 스토리나 사건의 환경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가령 누가 총을 쐈다고 하면 총, 피, 일그러진 얼굴, 이런 식으로 줄거리를 베이스로 하는 미장씬(장면)에 더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아버스 사진을 통해서 사진적이면서도 새로운 가시성의 영역이 보였어요. 사실 그녀가 나체 주의자나, 게이, 스트립 댄서, 트랜스베시타스(여장 남자 혹은 남장 여자)처럼 단순히 특수한 인물들을 찍었다고 훌륭한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런 인물들의 특이성과 함께 `반사‘나, `톤‘, `질감‘ 등을 주시하면 흥미롭습니다. 우울하게 눌려진 톤, 싸구려 반짝임, 그리고 조잡한 세부 디테일이 조형적으로 같이 작용을 해요. 저는 이런 사진만의 독특한 가시성의 요소들이 아버스 사진의 힘이 된다고 봅니다. “아줌마” 사진 역시 어두워 보이지만 정서적으로 여린 중간 계조도 늘리고 반짝임을 위해 상대적으로 하일 라이트도 높였습니다. 아무튼 관객들이 제 사진의 가시성도 함께 보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진: 아버스의 가시성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유사한 점도 많지만 차이점도 많은데요. 일례로 두 사람 다 후레쉬를 사용하고 전면성을 지향하고 있지만, 후레쉬 사용방법과 반사, 그림자의 차이도 있고 또 전면성에도 전체와 부분이라는 차이가 있는 데요. 특히 “아줌마” 사진의 경우 배경의 차이도 있습니다만.
오: 그렇습니다. 아버스의 가시성과는 다른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 사진의 특징일 수도 있습니다. 후레쉬 사용만 보더라도 그 용도, 지향점이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가령 “불확실한 존재“에서의 후레쉬 사용은 “아줌마“에서의 후레쉬 사용과는 많이 다릅니다. “불확실한 존재“에서는 굉장히 서정적이죠. 물론 전면성의 차이도 있고요.
진: 혹시 그것들이 캐스팅의 차이 또는 컨트롤의 차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까?
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스와의 차이는 캐스팅에 있어서 주류 영화적인 캐스팅과 인디 영화적인 캐스팅과의 차이일 것입니다. 제 사진이 주류 영화적이라고 한다면 아버스 사진은 인디 영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인디 영화가 좀 더 현실적이고 덜 세련 됐지만 훨씬 더 날 것 같고, 직접적이지요. 여기서 전면성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인물의 전면성의 경우,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컨트롤에서 올 겁니다. 저는 전면성을 컨트롤합니다. 그 점에서 당연한 얘기이지만 아버스는 전면성의 천재예요. 그녀는 전혀 컨트롤하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컨트롤이 필요없는 오리지날을 캐스팅 할 줄 알 뿐더러 그 인물에게 자신의 삶의 무게를 맞출 줄 알아요. 인물의 전면성은 확실히 카메라 뒤에 누가 서있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날 것 같은 사람이 카메라 뒤에 있어야 날 것 같은 인물이 표출 됩니다. 어떤 평론가는 그 날것 같음을 `얼어붙음‘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를테면 후레쉬를 터트렸을 때 멈춰있는 모습과 얼어붙은 모습은 다른 것으로서 이 얼어붙음이 바로 날것이라는 말입니다. 위지의 사진이 그런 경우인데, 위지 사진은 얼어붙고 날것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아버스 사진은 위지 사진에 비하면 또 다르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사진가의 삶의 무게에서 오는 것인데 제 사진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제 삶이 가볍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 본인 사진에 대해서 누구로부터 직접 비판이나 비평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오: 특별히 없습니다. 이영준씨가 “아줌마” 사진에 대해 그것이 `아줌마‘ 사진이냐, 아줌마 `사진‘이냐를 물어온 적이 있는데, 당연히 아줌마 `사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물음은 극히 예외적이고 내가 아줌마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 하는 비판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말을 하고 싶어요. 곰브리치의 말인데, 예술가들이 작업을 할 때 종종 자신이 작업을 통해서 세상의 본질을 보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세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 대한 작가 자신의 반응의 본질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런 오류가 현실에 개입하는 사진가에 의해 자주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즉 대상의 본질을 봤다고 생각하는 사진가가 그 본질이 자기 사진에 담겼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반응의 본질일 뿐입니다.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느낀 자신의 반응의 본질일 뿐이라는 거죠.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이를테면 물을 찍어놓고 물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사실은 물의 대한 자신의 반응의 본질을 이야기해야 옳은 것 아닌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줌마의 본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요? 저는 아줌마의 본질을 찍은 게 아니라 아줌마에 대한 나의 반응의 본질을 찍은 거에요. 그것도 아주 사진적이고 영화적인 반응 말입니다. 이런 류의 비판이 저를 부담스럽게 합니다. 사실 나는 사진기를 든 관찰자 일 뿐인데 누구도 알 수 없는 본질의 정체에 대해서 자꾸 이야기를 하라면 괴리감이 생기는 거죠. 거듭 얘기하지만 저는 아줌마 사진을 찍은 사진가이지 아줌마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문화비평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따금 제게 아줌마에 대해서 물어와요. 제가 마치 아줌마의 전문가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저는 아줌마를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단지 아줌마 사진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진: 본인 사진에 대한 얘기는 여기서 줄이기로 하고 사진에 대한 보편적 생각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형근씨 사진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견해를 말해주시겠습니까.
오: 모든 사진은 다큐멘타리 사진이에요.제 사진도 마찬 가지구요. 다만 내가 몹시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과연 내 사진이 엄밀한 의미로 다큐멘타리인가 하는 의문은 가지지요. 또 나는 기록에 대한 사명감이 조금도 없어요. 그 대신 호기심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저는 주제에 임할때,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일차적이라고 봅니다. 가끔 관심과 호기심 없이 그냥 기록 해놓아야 한다는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찍은 사진을 보는데 크게 감동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같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도 호기심을 보여 주는 사진에 더 애착이 가고 또 그런 사진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를 볼 때 학생이 개인적인 관심은 밝히지도 않고 우선 작업의 의미나 정의로운 대의 명분을 이야기하면 그냥 듣고만 있어요. 먼저 호기심을 일으키지도 않고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진: 역시 푼크툼적인 생각입니다. 어떤 면에선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세부적일 정도로요. 실제로 전체성과 보편성을 싫어합니까. 그렇다면 “광주” 사진을 찍을 때는 느낌이 어떠했습니까.
오: 사실 좀 이상하고 재미있었어요.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작업에 임했는데 광주 항쟁이라는 무거운 진실이 버거웠어요. 사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애국심, 사명감, 전체성, 그런 공동체적 의식이 부족해서 항시 비판을 받아 왔는데…
진: 말이 나왔으니 “광주” 사진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주시겠습니까. 이 사진은 이제까지 언급했던 사진들, 즉 “불확실한 존재“, “이태원 사람들“, “아줌마” 사진과는 다소 맥락이 다르게 느껴지는데요.
오: “광주” 사진은 장선우 감독이 영화 “꽃잎“을 만들 때, 포스터 사진을 작업하다가 급작스럽게 이루어 졌습니다. 영화 제작 중반에 광주 항쟁 당시 가장 대규모 시위 였던 금남로 장면을 찍는데 약 3000여명의 광주 시민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장감독은 리얼한 시위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 주, 조연외에 약 150명의 보조 연기자들을 훈련 시켜서 군중들 사이에 집어 넣었고 커다란 스피커를 동원해 `꽃잎‘의 장중한 주제 음악을 금남로가 울리도록 틀어 놓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곳곳에서는 타이어를 태워 검은 연기와 화염을 만들고 이따금 총소리를 내서 참여한 광주 시민들을 흥분 시켰습니다. 대부분의 광주 시민들은 영화라기 보다는 광주 항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진실되게 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인지 굉장히 진지하게 참여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너무 진지해서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연기를 해요. 진짜 광주 항쟁때 찍는 다큐멘타리에 인물처럼이요. 그래서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하라고 하다가 그냥 연기하는 모습을 찍었어요. 사실 연기는 가짜잖아요? 그런데 영화에 참여해서 하는 연기라는 행위는 진짜잖아요? 진짜와 가짜, 그 점이 재미있었어요.
진: 화제를 작가의 현실의 문제로 돌려보겠습니다. 21세기를 앞두고 저 개인적으로 한국사진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진가와 큐레이터를 만나면 한국사진의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보곤 합니다. 제가 묻는 질문 중에는 “21세기 한국사진에 어떤 사진가가 새롭게 부각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가“도 있었습니다. 미래를 얘기했던 만큼 그다지 많은 사진가들이 등장하지 않지만 오형근씨, 박홍천씨를 거론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30대라는 점에서 각별했습니다. 오형근씨는 이제 본인이 사진계의 주류라고 생각하십니까.
오: 네. 주류 문화의 대표성을 가진 미술관에서 초대를 받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주류라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좀 어색합니다. 제 스스로 주류라고 말을 하니까.
진: 곧 있을 서울 선재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선재가 오픈 되고 사진전으로서 오형근씨가 처음으로 초대됐습니다. 사실 그 동안 선재에 누가 맨 먼저 초대되는가 암중모색을 해왔는데 오형근씨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오형근씨가 초대된 데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만, 그러나 이 문제에 관심을 두었던 사람들은 솔직히 의외라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전시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오: 그래서 부담이 큽니다. 선재의 김선정 부관장이 초대한 것이지만 양쪽 다 부담이 큰 전시이기 때문에 몇 번 되물었습니다. 정말 내 작업에 대해서 확신이 있냐고 말입니다. 그렇다는 김 부관장의 확답을 받고 굉장히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 작업을 지난 5년 동안 보아 왔거든요.
진: 선재에서의 개인전은 여러모로 화재가 될 것이고, 또 전시 이후에 작가로서 위상도 고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가로서 한국사진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 역량이 뛰어난 젊은 사진가들이 지금보다도 더 많이 등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오: 역량까지야 모르겠지만 개인성을 가진 작가들을 많이 만나 보고 싶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호기심이 왕성한 작가들이요.
진: 사진구조에 대한 전망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미술계가 사진을 급속도로 수용해 가고 있는데요.
오: 혼성이 많아지겠지요. 문화든 매체든 개념이든 간에 일단 혼혈문화, 교차문화, 즉 접점의 문화들이 사진적으로 관심을 끌겠지요. 그리고 세기말도 지나고 세기초가 되면 역시 개념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고도로 훈련되고 수련된 예술이 다시 득세 할 것 같습니다. 마치 앤디 와홀 이후에 잭슨 폴락처럼…
진: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주로 어떤 얘기를 하십니까.
오: 영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가령 조명을 예로들면 노처녀와 대머리 총각 얘기를 다룬 “우중산책“이라는 영화를 이야기합니다. 촬영을 맡은 김형구씨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촬영 당일에 총 3대의 조명기중에 두 개가 갑작이 고장나 조명 하나로 전 촬영을 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명이 우중충하고 반사도 많고 그림자도 그로테스크하게 찐합니다. 그런데 그런 어설품이 영화하고 잘 맞아요. 그 영화 속의 캐랙터들의 삶이 그렇거든요. 아버스 사진도 마찬가지이죠.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대개 그런 경우인데 졸렬하고 생경스러운 조명에 미쟝 씬도 온통 알루미늄 샷시와 패인트 그리고 형광등 뿐이잖아요. 역시 어설퍼 보이지만 그래서 한국 영화가 되잖아요. 한국의 현실이 담기고 또 우리 일상의 단면이 보이고요. 가끔 학생들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세련됨에만 반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하지만 어설품도, 생경스러움도 적절하게 사용되면 훌륭해요.
진: 한국에 들어온 지 여러 해가 됐고, 작가로서 지명도도 얻었습니다. 가장 힘들었을 때와 가장 보람있었을 때가 있었다면 언제입니까.
오: 제 경력을 보시면 94-95년이 빠져 있습니다. 이때 제가 심각하게 사진판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어디로 가도 적응을 못했고 사진도 잘 안되었습니다. 물론 사진을 마땅히 보여줄 때도 없었고요. 아주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저는 술을 잘 못하는데 그때는 진짜 벽을 마주 보고 낮술을 마셨던 때였어요. 그때 저는 시나리오 쓰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보람있는 일에 대해서는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 전업작가가 되어 욕심 없는 작업을 할 수 있을 때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로버트 애덤스를 좋아하고 로버트 애덤스와 같은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진: 로버트 애덤스의 어떤 면이 좋은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 궁극적인 사진을 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궁극적인 사진, 그러니까 진짜 풀을 보고, 진짜 나무를 보고, 렌즈가 아닌 인간의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진가 말입니다. 그의 사진을 보면 톤이 보이지 않는 대신 바람 소리가 들리고 공기 냄새가 나고 풀을 보면 풀 자체로 좋고, 나무를 보면 나무 자체로도 좋습니다. 그의 사진이 궁극적으로 사진입니다. 아담스가 좋은 만큼 지금의 내 작업은 싫습니다. 톤이 보이고 개념이 보이 잖아요. 정말로 머리 쓰지 않는 사진을 하고 싶습니다.
진: 혹시 로버트 애덤스의 “왜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가”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지요.
오: 그 책은 한 두 번 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Perfect Time, Perfect Place」와 「Summer Night」와 같은 책을 좋아합니다. 그의 사진을 보면 가령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것들을 찍을 때 눈이 렌즈 같으면 안 좋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지금 제 눈은 렌즈 같거든요. 정말 느낌대로 찍고, 그런데도 인정을 받는 작가로 나고 싶습니다. 그게 제게는 덜 힘든 인생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 이후로 머리 쓰지 않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진: 이번 전시에 특별한 계획이 있습니까.
오: 롤지 사이즈의 30여 점을 전시할까 합니다. 그리고 세미나에서는 지금까지 찍었던 전량의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려고 합니다. 관객이 이제는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고 싶거든요.
진: 장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공적인 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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