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초상, 얼굴
김장언
“물이 요동쳤다
몇몇 피조물은 흔들렸다”
-Genesis, “The Fountain of Salmacis,” track 7 on Nursery Cryme, 1971
살마키스(Salmacis)는 본능과 욕망에 충실했던 물의 님프였다. 다른 요정들과 다르게 그녀는 홀로 몸을 가꾸고, 꽃을 모으며, 자신의 연못에서 시간을 보냈다. 살마키스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소년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us)를 보고 그와 영원히 함께 있길 기대했지만, 헤르 마프로디토스는 거절했다.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를 휘어 감고, 신에게 영원히 그와 함께하길 기원했다.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와 하나가 되었다. 오비디우스(Ovidius)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둘은 아니지만, 두 겹의 형태이고, 그래서 그들은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부를 수 없으며, 아마도 둘 다 아니거나, 둘 다이다.”1
사이의 주체들
오형근이 한국에서 찍은 사진들은 이태원의 사람들,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아줌마, 여학생, 군인, 그리고 젊은이들이다. 언뜻 다양한 인물들이지만, 그가 찍은 대상들은 서로 다른 층위로 모두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경계에서 부유한다. 《이태원 이야기》의 사람들은 한물간 배우들, 클럽 디제이,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이방인들의 장소인 이태원이라는 공간 속 그들은 한국의 통상적인 정상성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살아갔다. 한편 작가는 우연히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꽃잎》의 촬영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된다. 영화감독은 배우와 광주 시민들을 뒤섞어 금남로 시위 현장을 재현하고, 공권력은 그 영화적 재현을 보호 혹은 감시하기 위해 실제 경찰들을 배치했다. 작가가 찍은 사진의 인물들과 장면들은 영화의 한 장면인지 촬영장의 한 장면인지혹은그역사적사건의재현인지아니면그사건자체인지 우리를 혼동케 한다. 그리고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부유한다. 아줌마, 여학생, 군인, 모두는 사회가 규정한 특정 범주 속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사회가 부여한 의미와 자신의 목소리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들은 사회가 호명하는 자신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한편 자신이 누구인지 그 범주가 무엇인지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는 ‘중간’, ‘연기’ 등과 같은 단어로 그들의 현재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추측할 뿐이다.
2006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아마도 지속될 것 같은 《불안초상》 시리 즈에서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젊은이들’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작가는 젊음을 표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물학적으로 20대에서 30대에 걸쳐 있고, 그들은 시스젠더에서부터 트랜스젠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사진에 드러난 인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퀴어하다. 일반적이지 않고 이상하고 낯설고 묘하며 유별나 보이는 일군의 젊은 얼굴들 속에서 나는 어떤 ‘사이’를 본다. 그것은 경계가 명확해서 구분되는 틈이라기보다는 중첩되어서 모호하지만, 명확하게 드러나는 미묘한 것이다.
작가는 그 사이를 ‘불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안이 함축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작가가 인류학적으로 인간이 갖는 근원적 불안을 사진적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진이라는 매체가 갖는 근원적인 특성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을 화학적으로 고정시킨다는 측면에서 사진은 완전하지 않다. 시간이라는 빛이 전기 신호로 변화 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 또한 불안정하다. 매체의 불안정성은 매체의에 대한 불안으로 확장된다. 왜냐하면 빛이라는 시간을 고정시키는 것은 ‘정지상태(stillness)’, 미래 없는 현재만이 존재하는 어떤 순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지된 시간은 곧바로 사라짐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무섭고 두려우며 애틋한 것이다. 매체의 불안정성과 인간이 갖는 고유한 불안은 그의 사진에서 만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불안정성과 불안의 결과물을 바라본다.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의 정지, 그 시간의 상황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휘몰아치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안내한다.
초상 사진과 얼굴
초상 사진은 문제적이다. 초상 사진은 예술적 형식이라기보다는 사진의
유형적 형식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관계의 어떤 지표를 드러낸다. 초상 사진의 표면에 등장하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은 정치와 사회, 문화와 역사의 어떤 관계들을 드러낸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사회에 의해서 활발히 활용된다. 사진의 역사에서 전자가 명함판 사진(carte de visite)의 상업적 문화적 성공이었다면, 후자는 머그샷으로 대표되는 범죄자들의 초상 사진이나 식민지 지배 논리로 활용된 인류학적 사진들이 보여 준 차별과 감시였다. 따라서 초상 사진은 예술 이전에 이미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초상 사진의 미학적 실천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사진 이미지 속에서 드러날 때 우리에게 어떤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간파한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었다.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그는 초상화와 다르게 초상 사진은 그 대상을 예술 속으로 편입시키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대상을 현재의 시간으로 회귀시키는 무엇이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카메라는 점점 더 작아지고 점점 더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은밀한 이미지들, 그 충격이 관찰자의 연상 메커니즘을 정지시키게 될 이미지들을 붙잡을 것이다. 이 자리에 사진의 표제가, 사진을 모든 삶의 상황을 문자화하는 일에 포괄시키는 그 표제가 들어서야 한다. 그 표제 없이는 모든 사진적 구성은 불확실한 것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2
오형근의 대부분 사진들은 초상 사진이다. 그는 자신이 찍는 인물들에게 어떤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대상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기다린다고 한다. 상투적인 이 표현은 작가가 그들을 그들답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피사체인 인물, 주체의 시간과 재현의 시간이 늘 어긋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 시간의 합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긋남을 기다리고 있다. 조안나 로리(Joanna Lowry)는 ‘타자의 얼굴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가시적 영역에서 타자의 시선은 어떻게든 틈을 보여준다’는 레비나스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사진은 그 불가능성의 바로 그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타자의 시간은 그렇게 방해받지 않으며, 따라서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다.3
타자의 시간이 드러날 때, 오형근은 조명을 사용한다. 그 조명은 인물들을 사진의 표면에서 평평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주체들이 갖는 모든 물질적 대상들을 드러낸다. 개별적 인물은 사라지며, 그들이 입고 있는 옷과 장신구의 질감, 화장품의 색조, 피부의 주름, 몸짓과 시선 등이 물질화되어 나타난다. 오형근의 초상 사진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물이아니라타자의시간과재현의순간이어긋나는그순간,사진의표면에드러나는그 주체들 혹은 타자들의 물질성이다. 그 물질성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를 드러내며, 초상 사진이 만들어지는 생산 조건, 그 사진의 이해 가능성과 재현의 정치학 등을 작동시키고, 초상 사진 내부와 외부에서 대상 관계(object relations)를 형성한다.4 오형근 초상 사진의 표면에 드러나는 이러한 대상의 물질성은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함의들을 드러냄과 동시에 한편으로 그것을 은밀히 암호화하여 초상 사진의 시각적 가능성을 확장한다. 따라서 오형근의 초상 사진은 새로운 사회 문화적 역사를 구축한다. 그것이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구성적 사진의 가능성이 열리는 지점이다.5
둘 다 아니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
타자의 얼굴을 보는 것은 윤리적 경험이다. 그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도, 그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동일하다.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서 수 많은 프로필 사진으로 통칭되는 얼굴들을 보는 지금, 이것은, 늙은이의 넋두리 같을지라도, 타자의 얼굴은,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나의 얼굴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지하든 그렇지 않든 반성적이다.
오형근이 지금 보여 주는 타자의 얼굴은 모호하다. 그들은 이중적이거나 중성적이다. 그들은 정확하지 않다. 명료하지 않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누군가이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도 아니다. 생물학적성과 문화적 성의 구분이 교차되는 그들은 둘 다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살마키스에게 다시 돌아간다. 아름다운 소년, 헤르마프로디토스보다도 살마키스에게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살마키스는 사랑과 욕망, 거절과 상처를 지나 새로운 생성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살마키스는 대상을 교란시키며,전복시키고, 파괴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체성과 신체성을 만들어 낸다. 흥미로운 것은 살마키스는 욕망을 실현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지워지고 몸은 사라진다는 것이며,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육체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변화된 그 몸이 그의 자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오형근이 여기에 보여 주는 인물들은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 사이에서 유령처럼 부유한다. 작가는
그들의 현재, 둘 다이지만, 둘 다 아닐 수도 있는 그 상태를 드러낸다. 나는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 (noth-ing)’으로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가 규정하고 용인하는 대칭성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들의 초상 사진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그들의 환원될 수 없는 이중성을 출현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배경 없는 단색 앞에 물질적으로 드러난 그들의 얼굴과 몸의 세부는 그들이 스스로 사회적 주체로서 기능하고자 했던 욕망과 노력의 흔적들을 다양한 층위로 드러내고 감춘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군분투는 늘 엄격한 대칭성의 사회에서 차단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들의 현재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적으로 구축된 동일화를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형근의 초상 사진은 다른 얼굴로 우리들 앞에 드러난다.
1 Ovid, The Metamorphoses, trans. A. S. Kline (Poetry in Translation, 2000), 119.
2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발터 벤야민 선집 2』, 최성만 옮김(도서출판 길, 2009), 195.
3 Joanna Lowry, “Portraits, Still Video Portraits and the Account of the Soul.” in Stillness and Time: Photography and the Moving Image, eds. David Green and Joanna Lowry (Brighton: Photoworks, 2006), 65.
4 스티븐 쉬히(Stephen Sheehi)는 이러한 관점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아랍 지역에서 촬영된 대중적 초상 사진을 분석한다. Stephen Sheehi, The Arab Imago: A Social History of Portrait Photography, 1860-1910 (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6), xxxvii.
5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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