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ft/over

권태현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낱말을 만들어도 의미의영역바깥에남는부분이생기기 마련이다. 하루의 가장 밝은 시간부터 가장 어두운 시간까지 낮, 밤, 새벽, 저녁 등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 사이에는 어떤 말로도 부르기 어려운 어슴푸레한 구간이 있다.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분절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것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것들. 넘쳐흐르는 것들. 그러니까 구조 바깥에 남은 것들. 오형근의 연작 《왼쪽 얼굴》은 그렇게 남은(left) 것들의 초상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잉여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오형근이 아줌마, 여고생, 군인과 같이 특정한 정체성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이들의초상작업을해왔다는사실을염두에두면, 《왼쪽 얼굴》의 대상들에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는 점이 더욱 명료하게 감각된다. 성별, 세대, 직업 등 무엇으로도 묶어 내기 애매한 인물들의 초상이 여기 모여 있다.

《왼쪽 얼굴》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그 사진들을 찍은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연작에는 오형근이 오랜 시간 꾸준히 찍어 온 초상 사진들이 시간과 관계 없이 엮여 있다. 그중에는 다른 연작을 위해 촬영했던 사진도 눈에 띈다. 2006년부터 진행한 《불안초상》 연작에 포함되었던 사진이 이번 연작에 다시 들어간 경우도 있고, 다른 프로젝트에서 쓰지 않았던 사진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왼쪽 얼굴》은 오형근의 이전 작업들을 돌아보게 한다. 기존의 사진들에 구멍을 뚫어 새롭게 꿰어 내는 형상이 떠오른다.

오형근의 초상 사진들은 얼핏 유형학적인 것으로 읽히기 쉽지만, 그 형식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물론 그가 이미지들을 어떠한 연쇄 속에서 작동시킨다는 점은 유형학적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단순한 형태적 유사성이 아니라, 연쇄와 반복을 통해 인식의 조건이나 사회적인 환경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그가 유형학적인 무언가를 해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유형학의 문제들을 어떻게 비틀어 왔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이번 초상 연작은 유형에서 벗어나는 존재들의 사진이라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왼쪽 얼굴》의 뒤집어진 유형학, 그러니까 유형화되지 못한 것들의 유형학적 사진은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오형근이 예전부터 유형학적 방법뿐만 아니라, 초상 사진의 근본적인 부도덕성을 명확히 딛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의 폭력성이나 카메라 앞의 인물이 대상화되는 문제를 은폐하지 않는다. 그의 초상 사진은 카메라와 그 앞에선 피사체의 적대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오형근은 카메라의 존재론 자체를 초상 이미지에 전면화한다. 카메라는 결코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 카메라의 존재가 감각되는 순간, ‘찍힐 수 있다는 가능성’은 현실의 작동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돌아보아도 카메라가 진실을 담아내는 순간은, 오직 카메라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진실을 파헤치는 도구로 적극 활용했을 때 뿐이다. 나아가 스마트폰과 CCTV로 보편화된 카메라를 통해서 세계 전체의 조건이 바뀌고 있기도 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손에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들려 있고, 차량의

블랙박스와 거리 곳곳의 CCTV는 말 그대로 어디든 비추고 있다. 심지어 그렇게 포착된이미지는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내던져지기도 한다. 이것이 오늘날 사진의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는 차원이다.1 하물며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초상 사진은 어떨까. 인위적으로 조명과 대상화를 더욱 명확하게 하는 세트. 거기에서 일반적으로 초상 사진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거나 웃음을 요청하고,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들은 평소에 셀피(selfie)로 단련된 미소를 반사적으로 지어 보인다.

이런 기존 초상 사진의 조건을 딛고, 오형근은 카메라 앞에서 대상화된 피사체가 느끼는 부자연스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오형근의 문제 의식은 태도나 관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 낸 이미지의 표면에 배어 올라온다. 그가 찍은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은 아무래도 불편하다. 한껏 인위적인 표정을 짓다가 맥이 풀어진 상태이거나, 촬영이 길어졌는지 렌즈를 낀 눈에 실핏줄이 터진 경우도 많다. 그것은 얼핏 보면 눈물 맺힌 아련한 눈망울 같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결코 애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표정은 아니다. 오묘하거나 야릇하거나. 오형근의 초상에는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맺혀 있다. 그의 초상들은 표정에서도 무언가 구조화되지 못하는 사이의 공간을 열어 보인다. 얼굴 표정을 인식하는 알고리즘도 판단을 유보할 그런 표정. 화사하게 웃지도 않고, 찡그린 것도 아닌, 어떤 표정에서 또 다른 표정으로 가는 길목 같은 것. 표정과 무표정 사이를 가로지르며 감정 표현의 스펙트럼이 의미 작용을 멈추는 그 순간의 얼굴이 오형근에게 포착된다. 그것은 패션 사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비로움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호하여 보통은 ‘A컷’으로 택하기 어려운 것들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러한 모호함의 문제들은 오형근의 이전 연작인 《불안초상》과 함께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불안을 가시화하는 오늘날 문화 전반의 경향을 먼저 살펴보자. 불안이나 우울 등 심리적 상태를 내보이는 문화적 형식이 서브컬처에서 시작하여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약에 취해 웅얼거리듯 뱉어내는 스타일의 멈블 랩(mum-ble rap)이나 이모랩 (emo rap)이 2010년대 이후로 유행하는 경향이 포착 된다. 여기에서 파생되어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와 같은 갱신된 고스(goth)의 모습 또한 눈에 띄고, 한국에서도 우원재 같은 래퍼를 통해 우울 이 장르와연결되는모습을볼수있다.더욱이이러한경향은 형식을 달리해 동아시아 문화에서도 가시화된다. 소위 멘헤라(X)라 불리는 우울과 애정 결핍의 패션화 경향이 대표적이다. 기존 제도에 저항하는 과거의 서브컬처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보이지만, 가시화 전략에 있어서는 유의미한 분석 지점이 있다. 그들이 타자화하는 대상이 정상인/일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단지 패션에서뿐만 아니라, ‘갓생’, ‘갓반인’2과 같이 정상성 이데올로기를 타자화하면서 만들어 내는 어떤 간극은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안은 당대의 중요한 문화적 전경이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형근의 초상이 이렇게 불안함을 내보이는 인간 군상을 담아냈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는 오히려 초상 사진을 특정한 사람의 정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도록 하는 감각적 역학을 생각해 볼 필요 가 있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오늘날 예술의 성좌 속에서 초상 이미지가 실제의 존재와 연결되는 것으로 미학적 가능성을 매듭지 어 버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탈고유화된 유사성(dis-appropriate similarity)’이라고 부르는, 실제와 상관 없는임의의존재가그표면의이미지를통해현전할수있다는점이예술작업으로서초상사진이 가지는 미학적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3 증명사진과 예술 작업으로서의 초상 사진이 다르게 감각되는 까닭이 여기에서 발견된다. 예술 작업으로서의 초상사진에서 얼굴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작동한다. 얼굴은 존재가 드러나는 곳인 동시에 숨어버리는 틈이다.

다시 돌아와, 불안(anxiety)은 공포(fear)와 비교했을 때 그 의미를 톺아볼 수 있다. 공포는 대상을 가진다. 그것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공포는 대상이 있기에 재현이 가능하고, 또 그 대상을 제거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안은 대상 자체가 없다.4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고,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공포가 의미의 문제라면, 불안은 존재의 문제이다. 그래서 불안은 어떤 존재가 아니라, 존재에 뚫린 구멍에 비유되곤 한다. 이런 견지에서 《왼쪽 얼굴》의 디테일들은 아주 중요하게 작동한다. 피어싱 구멍, 모공, 삐져나온 잔머리, 잡티, 점, 털, 흉터, 눈의 핏줄, 컬러 렌즈의 패턴 같은 것들. 그리고 사진의 표면, 그러니까 살갗에 새겨진 타투의 이미지가 특히 눈에 들어온다. 모양과 색깔도 제각각이고 때로는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쓰여 있는 경우도 있다. “kiss me”. 납작한 피부(사진의 표면)에서 부어오르듯 도톰하게 올라온 글씨. 완전히 납작한 표면이 입체적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이 감각된다.

우리는 표면 너머 깊숙이 존재하는 어떤 진실을 기대하곤 한다. 그러나 표면을 걷어 냈을 때나타나는것은 숨겨져 있던 알맹이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표면일 뿐. 이미지 안쪽 깊숙이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표면에 배어 올라온 이미지를 통해 솟아난다. 그곳에서 사진의 납작한 표면은 우리를 누르고, 또 찌른다. 표면을 걷어서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표면에 ‘남아 있는’ 것들을 다시 거두는 시선을 생각한다. 얼룩 덜룩 뜬 화장, 흉터가 된 상처, 그리고 타투와 같이 표면에 머물지만 저 밑에서부터 배어 올라오는 이미지, 혹은 다시금 찢어질 가능성을 머금은 이미지들은 시선을 계속 빼앗는다. 오형근은 그렇게 살갗을 푹푹 찌르면서 표면/전면에 배어 올라온 상처들을 사진의 표면에 옮겨 낸다. 시간이 지나 흐릿해진 타투처럼, 살갗에 잉크를 너무 깊게, 혹은 너무 많이 찔러 넣어 부어오른, 망친 타투처럼. 표면에서 넘쳐흐르는 것들. 대형 포맷과 높은 해상도를 기반으로 큼지막하게 프린트된 사진의 물질성도 표면의 세부들이 넘쳐흐르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탠다. 그것은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을 한참 초과한다. 그러니까 그 표면에 남은(left) 것들이 왜 초과하는(over) 것인지. 그것이 왜 구조라는 그릇에서 흘러넘쳐 정해진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지. 이전의 그 모든 규정들을 왜 다 흩트려 놓는지. 불안하고 모호한 왼쪽 얼굴들이 말없이 던지는 질문에 덩달아 흔들리는 세계.

1 Ariella Aisha Azoulay, Civil Imagination: A Political Ontology of Photography (London: Verso, 2015) 참조.

2 ‘갓생(god+生)’은 뛰어나고 모범적인 인생을 뜻하는 신조어이며, ‘갓반인(god+일반인)’은 그런 삶을 사는 일반인을 의미한다.

3 Jacques Rancière, The Emancipated Spectator, trans. Gregory Elliott (London: Verso, 2008), 116. 국내 번역본은 다음 참조. 자크 랑시에르, 「생각에 잠긴 이미지,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현실문화, 2016), 165.

4 자크 라캉, 『욕망 이론』, 권택영 엮음, 민승기 외 옮김(문예출판사, 199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