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인’이라는 유형 -모호한 불안과 미세한 파열

문혜진

 

거리에서 사람을 볼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로 그 사람의 약점이다 (다이안 아버스)

 

20세기 초 발터 벤야민이 카메라의 눈이 가져다 줄 새로운 시지각적 경험을 기대 어린 어조로 선언했을 때 사진은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열광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장엄하고 우아한 자연, 미묘하고 찰나적인 순간, 일상과 가족의 따뜻함처럼 관습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에 천착했지만, 개중에는 빛의 이면에 가려진 어둠과 사회 병리적 결함에 눈을 돌린 이들도 많았다. 사회에서 소외된 빈민과 노동자들을 담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거나, 부르주아들의 고상한 마스크 아래에 들끓는 위선과 허위를 폭로하거나,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피사체로 선택함으로써 도덕주의 이면의 편견과 고통을 노출시켰던 사진가들이 그들이다. 이런 단순한 구분에 굳이 대입시키자면 사진가 오형근은 분명 후자에 속하는 작가다.

첫 작품 <미국인 그들>에서부터 2012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군인들의 초상 사진 연작 <중간인>에 이르기까지 오형근이 줄곧 추구해온 것은 인물 사진이라는 형식을 통한 사회적 다큐멘터리다. 초기 작업인 <미국인 그들>, <이태원 이야기>가 거리를 다니며 사회적 풍경을 채집하는 보다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면, 유명한 <아줌마> 연작과 <소녀연기>, <화장소녀>는 초상 사진이라는 형식을 빌어 아줌마, 소녀로 일컬어지는 특정 사회적 유형의 이미지를 일종의 도감(圖鑑)처럼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볼 때 약점부터 본다는 아버스처럼 카메라를 통해 사회의 틈새를 간파하는 오형근의 눈을 붙잡는 것은 피사체가 내세우는 외형적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는 모호한 정체성과 불안이다. 눈썹 문신에 빨간 립스틱을 하고 대차게 웃는 아줌마와 짧은 치마를 입고 아무것도 몰라요의 표정을 짓는 여고생(작가가 생각하는 아줌마와 여고생의 대표적인 모습)은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아줌마의 경우 유복한 사모님, 여고생의 경우 닮고 싶은 연예인의 모습)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만, 실상 그 이미지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스스로의 욕망이 아닌 타자의 욕망에 맞추는 수동적 주체의 불안이다. 기실 아줌마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부이고, 짧게 줄인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떠는 내숭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일찍부터 성적으로 대상화된 탓에 은연중에 요구되는 행동거지가 아닌가. 이들의 모순은 스스로의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고 불안정하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한데, 사진가로서 오형근을 매혹하는 것은 이런 중간자적 불안이다.

인물사진가로서 촬영 대상의 선정은 작업의 출발이자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한 요소다. 오형근이 선호하는 피사체는 소위 중간적 불안을 내포한 존재로, 그의 사진적 대상 전체는 중간인이라는 범주로 환원될 수 있다. <미국인 그들>은 미국 사회의 주변적 인물들을 찍은 것이고, 이태원은 한국과 미국의 접경지대이자 일반과 이반이 뒤섞이는 곳이며, 아줌마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제3의 성이고, 소녀는 성인 여성과 아이의 중간이다. 이러한 경계인의 속성은 군인을 찍은 <중간인> 시리즈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여기서 대상의 중간적 속성은 특별히 큰 흥미를 유발하는데, 오형근의 사병 사진이 일반적으로 군인의 초상에서 기대하는 바를 전혀 만족시켜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상명하달의 한국 특유의 조직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인 군대는 남성성과 집단성을 극도로 강요받는 장소다. 하지만 우리라는 말로 대변되는 집단 정체성은 오형근의 사진에서 묘하게 미끄러진다. 오형근이 선택한 대상은 규율과 명령이 몸에 배인 각 잡힌 대한의 건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눈에 띌 만큼 특이하거나 명백하게 소외되어 있지는 않으나 이들은 어딘가 미세하게 어긋나 있거나 틈이 있다. 아직 군대라는 조직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 사회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거나, 군대 밖에서 혹은 안에서 생긴 트라우마를 안고 있거나, 비교적 군인의 전형에 가깝더라도 우리보다는 가 두드러지는 것이다. 아직 앳되고 순진한 20대 청년의 얼굴을 지우지 못한 개인으로서의 사병들은 군인과 민간인, 순응과 일탈, 적응과 부적응 사이의 존재들이다. 이들의 존재론적 불안감은 사진의 세부에서 간취되는데, 얼굴보다는 손이나 발의 놓임에서 두드러진다. 반쯤 주먹을 쥐고는 있지만 불안하게 움찔거리는 손가락, 바닥에서 들린 발놀림으로 불안정함이 표출된 구두, 지나치게 꼭 쥐어서 도리어 부자연스러운 주먹, 다소곳이 가지런히 모은 두 발은 군인다움에 편입되지 못한 어떤 탈구들을 가리키는 지표다.

처음으로 시도한 남성 초상 및 집단 초상이며 초기 작업 이후 사라졌던 배경을 다시 집어넣어 이야기의 여지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일견 전작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듯 보이는 <중간인>은 근본적인 부분에서 단절보다 연속의 맥락이 훨씬 강하다.[1] 모호한 불안감을 드러내는 대상 선정과 아울러 눈에 띄는 것은 사진가와 촬영 대상의 심리적 거리다. 중간인을 지나치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중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오형근의 태도는 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 외견상 다큐멘터리 혹은 독일 유형학 사진을 닮은 그의 작업이 실상 다큐멘터리가 아닌 의사(擬似) 다큐멘터리, 유형학이 아닌 의사 유형학임을 깨닫게 만드는 핵심 기제다. 오형근은 특정 유형의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 동일 조건에서 사진가의 주관을 배제하고 최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유형학적 접근법을 이용하는 동시에 비튼다. <아줌마>, <소녀연기>, <화장소녀> 작업은 모두 도감이라는 형식과 유형학적 접근법을 이용해 아줌마와 소녀의 유형을 추출한다. 예를 들어 <화장소녀>의 경우 작가는 표본 선정에 있어 신뢰성을 위해 범위를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압구정과 청담동, 동대문 밀리오레와 신림동 순대골목, 이대 앞으로 세분해 가능한 모든 대상을 아우르도록 나름대로 범위와 체계를 구축했다. <중간인> 역시 비슷한 기준이 적용되어서 육해공군과 여러 계급을 모두 포함시키되, 전체 비중 상 절반을 육군으로 나머지 절반을 해군과 공군으로 할당하는 유형학적 분류가 적용되었다. 하지만 객관적 수집과 기록이라는 유형학의 원칙은 대상을 대하는 사진가의 시선에서 결정적으로 이탈되고 만다. 피사체의 심리적 불안을 예리하게 감지하는 오형근의 예민함은 대상에 일정 부분 감정을 이입하게 만든다. 작가가 관심을 둔 것은 명백히 드러나지 않은 중간적 불안이기에 해당 인물이 지닌 미세한 이물감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어느 정도 공명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오형근은 훨씬 더 공공연한 기인들을 철저히 외부자의 시선으로 찍은 아버스와 다르며, 유사한 사회적 주변인이라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내부자의 관점에서 친구들을 기록한 낸 골딘도 아니다. 피사체와 정서적으로 조응하면서도 어느 이상 거리감을 유지하는 오형근의 태도는 객관과 주관의 중간인 것이다. 이 중간성은 형식적으로 회색이라는 중간계조와 3-5m라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미디엄 숏 거리로 표출된다.

결국 사진가 오형근이 지속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모호한 불안을 표면에 드러내는 중간인들의 징후다이 징후는 사회적인 것이라 사회에서 회색지대가 늘어날수록 표출되는 불안의 양상은 미묘해지며 이를 드러내는 파열 또한 미세해진다과거에 비해 외부와의 소통이 늘어나고 이념이 약화되면서 복잡해진 군대 역시 여기서 예외가 아니며군대라는 공간 내부의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발생한 이미열 같은 불안(작가)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이번 <중간인> 연작이다. 중간인이라는 하나의 유형으로 수렴되는 오형근의 모든 피사체는 갈수록 불확실해지는 한국 사회의 미세 불안을 증언하는 낱낱의 표지다. 이를 포착해내는 작가 역시 그중 하나임은 물론이다.



[1]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은 사진 자체보다는 젠더에 따른 해석 쪽이다. 이를테면 군필자 남성의 경우 사병들의 계급에 따른 미묘한 권력관계의 표지에 훨씬 예민하게 반응한다.